시련은 드라마를 낳는다. 시련 중에서 국가단체 시련이라 할 만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를 맞이했던 97년 겨울 어느 장사꾼이 파산의 위기를 맞았다. 그의 성을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장’씨일 거라는 직감이 시방 드니 그를 장장사꾼, 줄여서 ‘장상’(張商)이라고 하자. 그는 원래 소를 키워서 팔고 남는 돈으로 또 소를 키워서 파는 축산가 겸 장사꾼이었다. IMF 사태 직전 그는 이십여 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었다. 돈으로 치면 한 마리당 500만원쯤, 하여 총 일억원쯤 되었을까. 그런데 IMF 사태가 닥치니 환율이 두세배로 뛰었고 환율이 뛰니 수입산이 대부분인 사료의 값이 곱절로 뛰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사료회사의 수입사료 없이는 가축을 키울 수 없다. 그래서 너도나도 소를 내놓다보니 소값은 반의반 이하로 폭락했다. 갓 태어난 송아지를 버리는 농가도 많았다. 나라에서 그 송아지를 대신 길러주는 ‘송아지 고아원’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송아지를 키우다가 형편이 좋아지면 주인에게인지, 어미에게인지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고아원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송아지들이 태반이었다.
장상 역시 다른 사람과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소장수, 소키우기 십년에 남은 거라고는 김영삼 정권에서 물경 45조원의 농촌구조조정 자금을 퍼부었을 때 남들과 함께 받은 보조금으로 지은 축사뿐이었다. 있는 소를 다 팔아도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장상이 그놈의 축사 들보에 소 고삐로 목이라도 맬까 심각하게 고려하던 참에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장상아, 지금 읍내로 가거라. 가서 네 소를 팔고 눈에 띄는 송아지를 모두 끌고 오너라. 송아지로 네 축사를 채우고 네 축사가 다 차면 이웃의 축사를 빌려서 채워라.’
장상은 집에 있는 소를 몽땅 끌고 읍내로 나가 반의반값을 받고 모두 처분했다. 그리고는 남들이 내버리다시피 하는 송아지 100여 마리를 살 수가 있었다. 왜 거저 줍지 않고 샀느냐. 스스로도 소를 길러왔던 그로서는 단돈 몇만원이라도 주지 않고서는 남의 피요 살과 같은 송아지를 도저히 끌고 올 수 없어서였다. 그런데 이런 그를 비웃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도 장상과 마찬가지로 소를 키우기도 하고 사고팔기도 하면서 살아왔는데 성은 박이니 박상이라고 하자. “저 바보 자슥, 기양 끌고가도 인사받을 송아지를 돈을 주고 사다이, 하매 뺑 돌았는갑다.” 장상은 송아지를 팔고 돌아서며 떠들어대던 박상의 말을 가슴 깊이 묻어두었다.
장상은 그 송아지들로 자신의 축사를 채웠고 이웃들의 외양간까지 빌려 송아지를 넣고 사료를 대주는 이른바 위탁사육도 시작했다. 산야에 새 풀이 돋고 자라면서 세월이 흘렀다. 송아지들은 자라서 소가 되었다. 그때가 되자 그 소들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던 송아지, 그러니까 그 소들의 동기생 송아지들을 너무 많이 잡아먹고 도태시켜 씨를 말리다시피해버린 탓에 소값은 다락처럼 올랐다. 그때 장상은 소들을 하나씩 내다팔아 수십배의 이익을 남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동업자 박상을 만났다.
“니 오양간에 소 한 마리도 없제?” “….” “니 소 필요하나?” “….” “돈 없어서 못 사겄제?” “….” “내 소 한 마리 팔까?” “….” “내가 너한테만 특별히 한 마리만 팔겄다. 바로 니가 나한테 판 그 송아지 말이다.” “나는 돈 없다카이….” “내가 딱 니가 나한테 넘길 때 받은 그 돈에 이자만 받겄다.” “….” “앞으로 남 쉽게 보지 말거라, 잉? 인생 모른다.” “….” “빨리 십만원 내놔라, 내 맘 나도 모르이.”
박상은 온몸을 굽혀 인사를 하고 소 고삐를 끌고 갔다고 전해진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바닥에 주저앉아 절망에 빠져있을 때 기회에 가장 가까와져 있는지도 모른다. 도식적이고 화학조미료 맛이 나는 ‘역전의 발상’ 이라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