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on the Wind, 1956년감독 더글러스 서크 출연 록 허드슨 EBS 3월30일(일) 낮 2시
“난 이 영화를 수천번 되풀이해서 봤다.” 스페인의 알모도바르 감독은 언젠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 영화가 <바람에 쓴 편지>다. 더글러스 서크 감독의 <바람에 쓴 편지>는 놀라운 영화다. 그것은 영화가 반복해서 볼수록 매번 새롭게 보인다는 것에 기인한다.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 영화가 난해하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바람에 쓴 편지>는 참으로 대중적인 영화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제작한 TV시리즈를 보고 있는 기분으로 감상해도 큰 무리가 없다. <바람에 쓴 편지>는 비유컨대, 여성의 속마음 같은 영화다. 깊숙하게 접근해갈수록 이것은 전혀 다른 텍스트가 되어 나타난다.
카일 해들리는 석유 갑부의 아들이다. 뉴욕에서 루시라는 매력적인 여성을 만난 뒤 카일은 그녀와 순식간에 결혼한다. 이들의 만남을 주선했던 미치는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게 된다. 한편, 오랫동안 미치를 짝사랑했던 이가 있다. 메릴리는 카일의 여동생으로 버릇없는 편이지만 미치를 끔찍하게 사모한다. 메릴리는 미치와 카일의 관계에 끼어들어 둘을 갈라놓고, 집안은 쑥대밭이 된다. 영화는 한 가지 미스터리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도입부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누군가 술에 만취한 채 방황하고 있고 어느 대저택엔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명백한 살인의 전주곡이다. 다음에 우리는 플래시백, 그러니까 시간을 거슬러올라 과거를 들여다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람에 쓴 편지>에 대해 영화학자 토머스 샤츠는 “즐겁지 않은 회전목마 같은 구조”라고 설명했다. 누군가 다른 이를 사랑하지만 그는 또 다른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있으며 이 구도가 한없이 되풀이된다는 의미다. A는 B를, B는 C를, 그렇게 또 그렇게. 메릴리와 미치, 루시와 카일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대를 애타게 갈구하지만 앞서가는 회전목마를 따라잡을 수 없듯 사랑은 불가능하다. 희망은 없다. 여기까지 보면 <바람에 쓴 편지>는 다른 서크 감독의 영화, 그러니까 <슬픔은 그대 가슴에>나 <순정에 맺은 사랑>이 그렇듯 무난한 멜로드라마처럼 여겨진다.
“미국 가족의 무기력함에 관한 비명 같은 에세이.” 어느 평자는 <바람에 쓴 편지>에 대해 일갈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이같은 메시지를 어딘가 ‘숨기고 있다’는 것. 서크 영화의 주제의식은 잘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 은닉해 있다. 관객에게 ‘나 찾아봐라!’라고 주문하듯 말이다. 호화로운 미장센과 대저택의 거대함은 탄성을 자아낸다. 강렬한 원색과 흥겨운 영화음악 역시 관객을 사로잡는다. <바람에 쓴 편지>는 수많은 기호와 상징, 그리고 미스터리를 구비한 채 조용하게 관객을 맞아들인다. 어서오세요, 라며. 서크의 영화는 신비롭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