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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9호(1925~1926) [1]
이유란 2003-03-24

영화사신문 제9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25 ~ 1926

걸작 <탐욕>, 만신창이 개봉제작자 어빙 탈버그, 이번에도 무차별 가위질

1925년 1월,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의 신작 <탐욕>이 드디어 개봉했다. 1923년 3월에 크랭크인했으니, 거의 2년 만이다. 잔인성을 피 속에 타고난 치과의사가 결국엔 아내와 그를 배신한 옛 동료를 죽이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어두운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흥행에서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감독인 스토로하임은 이 영화 보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편집에서 감독이 배제된 채 제작자의 의도대로 최종 프린트가 나왔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상영시간이었다.

사단은, 스트로하임이 1924년 초 9시간 분량의 편집본을 제작사인 골드윈에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안그래도 스트로하임이 제작비를 3배나 초과하는 바람에 골머리를 썩고 있던 골드윈은 1, 2부로 나누어 개봉할 수 있도록 상영시간을 줄여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스트로하임은 270분짜리 최종 편집본을 내놓으며, 그 이상은 절대 줄일 수 없다고 통고했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돌출했다. 그해 골드윈이 MGM에 합병되면서 <탐욕>이 제작자 어빙 탈버그 수하에 들어간 것이다. 탈버그는 MGM 소속의 작가 조셉 판함에게 이 영화의 편집을 맡겼다. <탐욕>의 원작소설도, 촬영 스크립트도 읽어본 적이 없는 판함은 서브 플롯들을 왕창 들어내는 등 자의적으로 영화를 편집하고 나머지 필름을 파기했다.

2년 제작과정 끝에 25년 1월 개봉한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의 <탐욕>.

사실, 스트로하임과 탈버그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악연은 스트로하임이 유니버설에서 <어리석은 아내들>을 찍으면서 시작됐다. 이때 스트로하임은 제작비를 6배나 초과한 112만달러를 쏟아부은 끝에 6시간짜리 영화를 내놓았다. 이에 탈버그는 영화를 150분짜리로 재편집하도록 했다. <어리석은 아내들>은 흥행에 대성공했으나, 결국 23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어쨌거나 능력을 인정받은 스트로하임은 차기작으로 유니버설에서 시대물인 <메리 고우 라운드>를 찍는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어리석은 아내> 짝날 듯이 보이자 탈버그는 스트로하임을 해고한다. 이에 스트로하임은 유니버설을 떠나 골드윈으로 적을 옮겨 프랭크 노리스의 자연주의 소설 <맥티그>를 원작으로 한 <탐욕>을 찍었다. 그런데 편집을 둘러싸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골드윈이 MGM에 합병되면서 역시 유니버설을 떠나 MGM에 합류한 탈버그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스트로하임이 MGM에 잔류,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의 여부는 <탐욕>의 흥행 성적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가지마! 루돌프루돌프 발렌티노 장파열로 사망, 한 여성팬 자살

1926년 8월30일, 여름비 속에서 만인의 연인인 루돌프 발렌티노의 장례식이 열렸다. 이날 장례식에는 4만여명의 군중이 모여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으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파라마운트 대표 아돌프 주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사장 요셉 슈넥 등이 관을 운구했다. 여성들이 그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탓인지 이날 장례식 분위기는 거의 폭동에 가까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그중 일부가 발에 깔려 다쳤으며, 묘지에서는 한 여성팬이 손목을 그어 자살했다. 이 여성만이 아니다. 경찰에 따르면 발렌티노가 사망한 8월23일 이후 일주일 동안 적어도 10명의 여성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죽음은 너무 빨랐고, 너무 느닷없었다. 발렌티노는 겨우 서른한살이었는데, 장파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1913년에 미국으로 건너온 이 라틴계 미남은 뉴욕의 한 카페에서 전문 무용수로 활동하다 1917년 할리우드로 날아갔다. 처음엔 전형적인 사악한 외국인 역할을 맡았으나 1921년 <묵시록의 네 기사>에서 운명적인 플레이보이로 출연하면서 여성들의 광적인 사랑의 대상이 됐다. ‘분홍 분첩’(pink powder puff)으로 불렸던 그는 여성들에게 부드럽고 낭만적인 애인이었다. 여성들은 그에게서 완벽한 사랑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과 영화를 혼돈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내가 아니라 스크린 속에 그려진 나와 사랑에 빠지는 거다. 나는 그저 여성들이 그들의 꿈을 그려넣는 캔버스에 불과하다.” 죽기 얼마 전, 발렌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단 신 들

<기쁨없는 거리> 영국 상영 금지

1925년 G. W. 파브스트 감독, 그레타 가르보 주연의 <기쁨없는 거리>가 영국에서 상영 금지됐다. 또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는 장면 일부가 잘린 채 개봉했다. 문제는 이 영화가 어두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는 데 있었다. <기쁨없는 거리>는 초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비엔나를 배경으로, 한 중산층 가정의 몰락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원치 않게 싸구려 밤무대 가수가 되는 여주인공 마리아 역은 최근 급부상한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맡았다.

“히치콕, 거장의 비전을 가진 젊은이 ”

“거장의 비전을 가진 젊은이.” 영국 영화계에 새로운 기린아가 탄생했다. 1926년 3월, 영국의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최근 <쾌락의 정원>으로 데뷔한 신인감독 앨프리드 히치콕(27)에게 이러한 찬사를 보냈다. 10대 후반에 파라마운트 런던 지사에 입사한 히치콕은 편집기사로 영화에 입문했으며, 이어 마이클 발콘의 영화사로 자리를 옮겨 각본과 미술감독, 조감독으로 일해왔다. <쾌락의 정원>은 런던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두명의 여성, 질과 패치의 사랑과 실패한 결혼을 그린 멜로드라마다.

독일 쿼터법 제정

1925년 1월 독일에서 외국영화의 수입을 제한하기 위한 쿼터법이 제정됐다. 이 법에 따라 앞으로 독일영화 한편을 만들어야 외국영화 한편을 수입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이번 조처는 점증하는 할리우드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사운드시대 열렸다

1926년 8월26일 워너브러더스가 자체 개발한 바이타폰 영화 <돈 주앙>의 시사회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워너는 이날 성악가 지오바니 마르티넬리의 콘서트와 함께 존 배리무어 주연의 <돈 주앙>를 상영했다. 극중인물의 대사에 소리가 입혀진 것은 아니지만, 관객은 극장 안 오케스트라단의 실연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자연스러운 소리의 재생, 악기들의 음질, 뮤지션들의 입모양에 맞춘 음악의 타이밍은 정말 놀라웠다. 바이타폰이 관객을 유례없는 흥분에 빠뜨렸다”라고 시사회 분위기를 전했다. 워너브러더스는 유성영화 개발을 위해 지난해 바이타폰사를 설립하고 사운드 실험에 300만달러를 투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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