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스파이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자란 보통 사람들 중에, CIA의 요원이 되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적진에 침투해서 최첨단 장비로 그들을 교란시키고, 특급정보를 캐내거나 악한을 처단하는 자신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처럼 멋있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멀리 있는 CIA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국가정보원(과거 중앙정보부 혹은 국가안전기획부)의 부정적인 면들을 하나하나 알게 되면서, 스파이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은 여실히 깨져갔다. 때마침 멋있게 묘사되기만 하던 할리우드영화 속의 스파이들도, 점차 현실적으로 변해갔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들 중에서는 <스파이 게임> <썸 오브 올 피어스>가 CIA 요원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스파이에 대한 막연한 미련을 못 버린 이들에게, 미국의 CIA는 여전히 꿈의 직장쯤으로 생각될 법하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미국 CIA에서 한국전문가를 선발한다는 구인공고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Korean Language Officer’를 구한다는 구인공고의 세부내역을 보면, 대졸 이상으로 한국어를 한국인 만큼 잘하는 사람을 선발해 주로 한국어의 번역과 통역 등을 맡길 예정이라고 써 있다. 업무의 성격상 선발과정에서 신체검사, 거짓말 탐지기 검사, 배경조사는 물론 한국어 테스트도 포함된다. 물론 이런 공고가 났다고 당장 웹사이트에 접속해 지원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우리의 국가정보원이 그런 것처럼, 기본적으로 미국 CIA는 미국 국적자들만 선발하기 때문이다. 배경조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미국 국적자라 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걸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CIA 공식 홈페이지.
1994년 체포될 당시 올드리치 에임스의 모습과 그가 이중 스파이 활동을 하면서 만든 비밀 메모.
<리크루트>에서 CIA의 채용을 담당하는 월터의 역할을 맡은 알 파치노의 모습.
이번에 개봉된 영화 <리크루트>는 MIT를 졸업하고 앞서 말한 것과 유사한 과정을 통해 CIA에 들어간 한 신입요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콜린 파렐이 부여받게 되는 첫 임무는 조직 내에서 암약하는 이중 스파이를 색출하라는 것. 재미있는 것은 철저한 검증을 통해 선발되고, 선발된 이후에도 완벽하게 관리된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CIA 내부에서 이중 스파이가 문제가 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1994년 2월 체포된 올드리치 에임스 관련 사건.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에임스는 1960년대 초반부터 CIA에서 근무를 시작해, 주로 러시아의 대외 첩보 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업무를 담당했었다. 처음에는 터키, 멕시코 등 해외근무가 잦다가 1985년부터는 워싱턴 DC 근처에 있는 CIA 본부에서 러시아와 동유럽 담당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가 이중 스파이로 변신한 것은 워싱턴 DC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서 KGB 간부에게 포섭당한 이후다. 물론 포섭의 미끼는 돈. 첫만남 이후 5만달러의 돈을 받은 그는 소련에 CIA와 FBI의 첩보 활동 정보를 넘겨주는 대가로 지속적으로 돈을 받아 챙겼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콜롬비아에서, 1987년에는 로마에서 근무하며 KGB 간부들과 만나 관계를 강화시키기까지 한 그는, 다시 워싱턴 DC 근무를 맡은 1989년부터 수백만달러의 공작금을 받고 핵심적인 정보들을 유출시켰다. 그때 그가 유출한 정보의 대부분은 CIA를 위해 일하고 있는 소련 내 인사들의 신상이었는데, 그 때문에 CIA는 연달아 정보원이 사라지는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뒤 몇년간 잘 버티던 그의 꼬리가 잡힌 것은 CIA 내의 그런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FBI가 내사에 착수하면서였다. 재규어 승용차를 모는 등 CIA 간부로서는 너무 부유하게 살고 있는 에임스를 최우선 용의자로 꼽고 주변을 살피는 과정에서 단서들이 포착된 것. 특히 1993년 11월 그가 콜롬비아에서 KGB의 후신인 러시아 해외정보국(SVRR) 요원과 접선한 일은 결정적인 물증이 되었고, 몇 개월의 보강수사가 끝난 1994년 2월에 정식으로 체포된다. 중요한 것은 그의 체포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우선 2차대전 뒤 최대의 스파이 사건이 공개됨과 동시에,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냉각되었다. CIA 대표단이 러시아를 방문해 강력한 항의와 함께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고위 정보책임자를 송환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미국은 그를 강제 추방시키기까지 했다.
CIA 내부도 물론 발칵 뒤집혔다. 우선 에임스가 요원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에서 1986년 이후 3번이나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묵살되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졌다. 따라서 CIA의 위상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백악관이 아예 미국 내 모든 대스파이 업무를 FBI에 넘기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을 정도. 문제는 그런 혹독한 시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96년과 98년에 또다시 에임스와 유사한 형태의 CIA 직원 내 이중 스파이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치열한 스파이전에서는 정예의 CIA 요원이라도 언제든지 변절할 수 있고, 그것을 막기 힘들다는 사실이 확실히 증명된 것. 영화 <리크루트>는 바로 그런 과거의 사실들을, CIA의 신입요원이라는 주인공의 설정에 맞추어 잘 활용할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CIA 공식 홈페이지 : http://www.cia.gov
<리크루트> 공식 홈페이지 : http://touchstonepictures.go.com/recruit
<리크루트> 한글 공식 홈페이지 : http://www.therecrui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