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보고 나서 진짜 영웅이 누구인지를 따져보는 건 꽤 진지해 보이지만 별 소득없는 일이다. 무릇 무협지에서는 주인공만이 영웅이고,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법이다.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온갖 영예와 희한한 것들을 남김없이 누린다. <영웅>에서 강호의 고수들은 얼어죽을 천하 타령으로 다 죽고 진시황만 살아남았다. 혹자는 진시황을 영웅으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그는 강호인이 아니니까 이는 잘못 짚은 것이다. 게다가 그를 영웅이라 해버리면 이 영화는 정치영화, 이데올로기영화라는 느닷없는 규정을 가지게 된다. 또한 <영웅>은 기꺼이 노예가 되어 채찍으로 맞고 싶은 자들을 흥분시키는 사도마조히즘적인 영화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딱 잘라 말해서 요즘같이 개화된 시절에 영웅 좋아하는 인간은 노예다. 그러니 그 영화를 만든 민족이 들뜬 흥분에 휩싸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걸 비난한다든가 두려워한다든가 할 건 없다. 그냥 조용히 한마디 갈겨주면 된다. 너네들 노예민족이니?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일 없을 듯하니 걱정 안 해도 될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 안에 노예 근성은 없는지, 그걸 빌미로 박모씨 같은 저질 인간을 영웅으로 모시는 극저질주의자들이 들뜨지 않을까 하는 점을 경계하지 않아도 될까. 한국의 우익은 인류사의 금자탑이라고 주장하는 이라면 모를까, 세상에 어떤 정신나간 작자가 <영웅> 보고 나서 영웅의 손에 깩 하고 죽는 노예가 되고 싶을까. 그런 일 절대 없을 게다.
<영웅>을 보고 나서 고난도의 단어들을 가져다가 이리저리 덧붙여보는 건 꽤 학구적으로 보이지만 덧없는 일이다. 영화라곤 일년에 한두편, 그것도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면 스토리 불문 내용 불문하고, 오로지 그 배우 보기 위해 영화를 보는, 설혹 그 배우가 나온다 해도 <갱스 오브 뉴욕>처럼 맘에 안 드는 배우가 동시 출연한다면, 둘이 동시에 등장하는 신에서는 화면 한쪽을 가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귀찮아서라도 안 보는, 어중이떠중이 회사원 눈에 영화란 그저 재밌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심도깊은 논증을 하는 건 애초에 틀린 일이다. 오로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왔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본 속류 관람자는 영화를 본 다음에도 천상의 비평가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몇 가지 조각 정보를 되새기며 그것들을 머릿속으로 집어넣어 기억으로 만들 뿐이다. 그에게 <영웅>은 중국영화다. 중국영화답게 차고 넘친다. 한마디로 푸짐한 오버다. 색도 오버, 화살도 오버, 무공도 오버, 사방이 오버다. 이런 걸 멋있게 말해 대륙기질이라 하던가. 그에게 <영웅>은 무협영화다. 저급에서 고급까지 온갖 무공이 등장한다. 활 받침대가 되기 위해 뒤로 벌러덩 자빠지는- 이 장면에 얼마나 놀랐던지…. 그들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하던 초절정 무공을 시전하는 줄 알았다- 애송이부터 딴딴한 창을 물컹물컹하게 만들어 휘두르는 노부까지 나온다. 무협지에서 익히 읽었던 경공과 초식들이 좌르르 펼쳐지고 난무한다. 이쯤이면 더 할말없고, 남은 건 아직도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한, 극장비를 아깝지 않게 해주기 위한, 즉 관람평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몇 가지 어드바이스뿐이다. 무공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주 마시고 들어가서 초반에 이연걸과 장천의 대결을 본 뒤 곧바로 취침개시. 장쯔이 보고 싶은 이들은 인내력 테스트 할 거면 보고 아니면 보지 말고. 그는 이 영화에서 완전히 망가졌다. 안쓰럽다. 자연 풍광 즐기는 양반들은 콜라로 팝콘 넘기며 대충 빈둥대고 있다가 중간쯤에 신경을 약간만 바짝 쓸 것. 왕가위 팬이라면 <중경삼림> 보듯 보면 될 테고. 얼추 이쯤이면 <영웅>에 대한 속류, 삼류평은 다 된 셈이다.
<영웅>을 보고 나서 온갖 상념에 잠기는 것은 꽤 사려깊어 보이지만 씁쓸한 일이다. <영웅>을 좋아할 수는 있다. 비평가가 뭐라 하든, 비평은 고작 취향에 개입하는 권력일 뿐이니 그저 좋아하는 만큼 보고, 좋아하는 만큼 즐기면 된다. 영웅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예 선언이다. 어디 가서 큰소리로 떠들 일 아니다. 직장에서 따돌림 당하는 수가 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영웅을 좋아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소리치려면 영웅은 무엇인지, 진짜배기 영웅의 조건은 무엇인지부터 따져봐야 하겠거니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난 시절의 영웅들은 거짓 영웅임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