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 | 프리랜서 카피라이터·광고 칼럼니스트 hyuncom@unitel.co.kr
제작연도 2001년
광고주 NIKE
제작사 The Jupiter Drawing Room, Johannesburg
아티스트 Heloise Jacobs
카피라이터 Gavin Williams, Brendan Jack
이봉주의 보스턴 제패는 신화였다. 남루한 외모, 빈약한 체구가 만들어낸 시대의 드라마였다.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지 않더라도 그는 한
인간으로 다른 인간들에게 극한의 감동을 선사했다. 정해진 지점을 단 몇초만 늦게 통과했어도 그를 향해 터져줄 카메라 플래시는 없었을 것이다.
승리를 양보한 용사에게 돌아올 것은 오히려 빈정거림과 조소, 비난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운한 마라토너, 만년 이등, 투지와 근성의 부족, 한국
마라톤의 고질병… 운운. 어쨌든 그는 월계관을 썼다. 그리고 그에게 따라다니던 수모와 자기비하, 동정 따위를 일거에 벗어던졌다.
그날 승자의 어설픈 웃음이 브라운관을 가득 메우던 날, 두고두고 내 기억세포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상이 하나 있었다. 결승선을 불과 몇십 미터
앞에 둔 지점에서 영광의 주인공을 앞서 달리던 어떤 물체가 카메라에 잡혔다. 무슨 거미 같기도 하고 박쥐 같기도 한 괴물체. 그것은 다름 아닌
장애인을 태운 휠체어였다. 마라톤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출발선을 떠난 ‘운명의 반항아’들은 그 시각에 그렇게 세인들의 우연한 곁눈질을 받고
있었다. 죽어라고 휠을 돌려대며 시간과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들만의 마이너리그. 적어도 내게는 그날의 메이저 게임보다 몇배 더 저릿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광고의 리그에도 몇몇 인물들이 오버랩된다. 마이클 조던, 보 잭슨, 존 매켄로, 앤드리 애거시, 배리 센더스, 시드니 몬크리프, 칼 루이스,
마이클 존슨, 세르게이 부브카…. 오늘날 나이키의 브랜드이미지를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스타 플레이어의 이름들이다. 나이키의 스포츠 제국은
흑인과 백인, 남과 여, 나라와 종목을 가리지 않고 당대의 기라성들을 황제로 추대했다. 때로는 뭇별 중에 섞여 광채를 빛내지 못하던 신성을
미리 발굴해 스타덤에 올리는 마케팅 육감을 발휘하기도 했다. 무명의 골퍼였던 타이거 우즈도 나이키 웨어를 입고서부터 승승가도에 가속도를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들의 성공신화는 곧 나이키의 성공신화로 편입되었다.
나이키의 얼굴들이 모두 화사한 광휘를 띠고 매체를 장식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축구선수 브라이언 맥브라이드의 발톱, 농구선수 케빈 가넷의팔목 밴드, 육상선수 밥 케네디의 뒤꿈치, 농구선수 스카티 피펜의 코가 모델로 초빙되기도 했다. 얼굴을 감추고 특정 신체부위를 강조함으로써
징크스에 곧잘 사로잡힐 만큼 예민한 운동선수들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표현전략이었다. 우아한 것, 위대한 것, 화려한 것, 강한 것, 반듯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위악적인 반발이기도 했다. 스포츠의 터프함과 섬세함, 그 양면성을 묘사하는 탁월한 기획이었다고 평가된다. ‘우리는 꿈을
팔지 않는다. 신발을 팔 뿐이다’라는 나이키 현실주의가 지향하는 마케팅 방식이기도 했다.
한술 더 떠 최근에는 장애인들이 나이키의 광고 모델로 나서기도 한다. 눈은 이글거리고 입은 비틀어지고 얼굴근육이 일그러져 있는 반항기 어린
마이너들이 광고에 등장하고 있다. 메이저리그에 가려진 스타들을 발굴해서 어떤 비주얼 스캔들을 유발해 보겠다는 전략일까? 꼭 그렇게 단순하고
치기어린 계산으로 볼 일은 아니다.
“볼 테면 봐!” 한쪽 팔과 또다른 한쪽 손이 뭉텅 잘린 선수가 냉소어린 시선으로 내뱉고 있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그에게 시선을 주어야
할까? 정작 보이는 사람은 당당한데 보는 사람이 왠지 주저하게 되고 괜히 힐끔거리게 된다. 헤드라인 아래의 카피가 쭈뼛거리는 독자를 향해 마음의
빗장을 풀어준다.
‘세계기록 보유자가 아니었다면 당신이 보기도 힘든 사람이야.’ 그렇다. 우리는 그의 육신이 풍기는 그로테스크한 뉘앙스보다는 그의 인생이 쌓아올린
불멸의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또다른 광고 한편. “동정해도 좋아!” 뭘? 인조보족을 하고 있는 이 수영선수의 빈약한 다리를? 아니다.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남다른 외모나 신체조건이 아니라 그가 간발의 차이로 상실한 우승의 아쉬움이다. 카피가 그렇게 적고 있다. ‘그는 100분의
1초로 금메달을 놓쳤다.’
휠체어의 바퀴를 부르잡고 비장한 눈길로 이쪽을 향하고 있는 선수의 모습도 눈길을 고정시킨다. “곁에 있는 게 쪽팔린다구?” 하지만 본문을 보면
왜 그가 그처럼 자신만만한지 금방 알 수 있다. ‘어쩌면 당신 따위는 준결승에서조차 그와 한번 겨루기 힘들 거야.’
장애인 올림픽을 협찬하는 광고들이다. 신체만 불편할 뿐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다.
제품도 슬로건도 보이지 않는다. 승리의 날개 마크와 찡한 여운밖에 남는 게 없다. 그렇다고 무책임한 비주얼 스캔만들이 목표는 아니다. 나이키다운
큰 브랜드의 자신감으로 보여진다.
물론 광고의 마이너리그에 장애인이 출전한 사례는 나이키가 처음은 아니다. 미국의 고급백화점 체인인 노드스트롬은 패션브랜드 카탈로그에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미모의 젊은 여성 등 장애인, 노인, 소수인종들을 등장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제전화회사인 ATT는 농아여배우 말리 매틀린과
하반신 마비자인 슈퍼맨의 주연배우 크리스토퍼 리브를, IBM은 하반신 마비자인 그래미상 수상가수 커티스 메이필드를, GM은 암벽등반가 출신의
장애인 마크 웰맨을 기용해서 신선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나오는 광고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그들에 대한 온당치 못한 시선은 오히려 소비자보다는 광고주쪽이 더한 것
같다. 겉으로는 소비자의 불편한 심기를 염려하면서도 사실은 그들의 모습이 브랜드에 끼칠 왜곡현상을 걱정하고 있다. 소비자는 그렇게 미숙하지
않다. 우리가 광고에 나온 장애인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외모의 그 특이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생애 속에 어른거리는 비장의 드라마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상상외로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