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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공평한 비극의 이름
2001-05-02

숏컷 | 김봉석 칼럼

하루모토 쇼웨이의 <기린>은 ‘라이더’의 부나방 같은 삶을 그린 만화다. 자동차 대신 오토바이를 고집하는, 극단적인 스피드와 자유를 꿈꾸는 자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나이 30이 넘어서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이들을 ‘또라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극단적인 자유는, 끝까지 돌진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무모함은 젊은 시절에나 가능한 특권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특권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은, 바보 아니면 아웃사이더다. 아주 드물게 천재거나.

나 역시 20대에는, 서른살 이후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서른 즈음에>를 부를 때에도 거기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언젠가는 30대를 넘어서고 중년이라는 고개에 접어들겠지. 숨을 헐떡이며, 연신 뒤를 돌아보며.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였을 뿐이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언젠가 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미 진창에 빠져 있을 테지만 그 시절에는 알 수 없다. 그 시절의 우상은, 현명한 노인이 아니라 요절한 짐 모리슨이나 장렬하게 전사한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였다.

30이 넘어 한참을 달려온 지금. 그 시절, 흔히 ‘청춘’이라고 부르는 그 시기를 돌아보면 비슷한 느낌이 든다. 지나온 길이지만 어쩐지 꿈속을 헤쳐온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은 같은데 나의 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여전히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면, 여전히 기억할 수 있을까? <기린>에서 30이 가까운 나이에도 모히칸 머리를 하고 오토바이를 타는 라이더는, 이번 설에는 반드시 집에 오라는 형의 연락을 받고 번뇌한다. ‘아직도 그런 짓을 하고 있냐고, 세상이란 녀석이 비웃는다.’ 그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누구도 노골적으로 욕하지는 않지만 그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아니어도, 세상이 비웃는다.

하지만 추월선에 들어가지 않고 안전하게 다른 차들과 보조를 맞춰가는 운전자는 그를 부러워한다. 나에게도 한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젊음과 오토바이 그 고귀한 존재’와 동격이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는 뒤늦게 꿈을 꾸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음은, 형벌이 아니라 현실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진짜 비극은 그게 어떤 젊음에게도 30이란 숫자는 언젠가 현실로 닥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종착점은 결국 소멸인 것이다. 장렬하게 죽지 않는 한, 그들은 곧 비루해진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청춘에는 독특한 무언가가 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뭔가 탐나는 것은 있다. 적어도 그때에는, 권태가 없다. ‘언제나 무엇인가에 굶주려 있었다. 모든 것이 분노의 대상이었다.’ <기린>에 나오는 고백처럼, 젊은 날에는 갈증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진창에 발을 담그고나면,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는 걸 알고나면, 늘어진다.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할 수는 있지만,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기린’이란 제목의 한 의미는 거기에서 나온다. 사자에게 습격당한 새끼를 보며 멀리서 서성이는 어미 기린의 모습. ‘슬프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사자에게 달려들 용기는 없는.’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