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너구리 속을 알 수 있을까?
2002년 미국 게임 시장의 규모가 100억달러를 돌파했다. 같은 해 영화 흥행수입 총액인 93억달러보다 앞섰을 뿐 아니라 한발 먼저 100억달러 벽을 깼다는 상징적 의미도 있다. 게임잡지들뿐 아니라 돈문제라면 민감한 각종 경제잡지들까지 멀티미디어 산업의 왕자가 교체된다며 흥분해서 떠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플레이스테이션2 국내 출시 1주년을 기념해 <슬라이 쿠퍼>가 출시되었다. 원제는 거창하기 짝이 없는 <슬라이 쿠퍼와 티에비우스 라쿠누스>. 까놓고 말하자면 ‘너구리 도둑론’이다. 주인공 슬라이 쿠퍼는 도둑질 하나로 오랜 세월 번성한 명문 너구리 가문의 후예다. 이 가문에 위기가 닥쳤으니, 대대로 이어진 도둑술을 집대성한 책 ‘티에비우스 라쿠누스’를 악당들에게 강탈당한다. 빼앗긴 비전서를 되찾아오기 위해 슬라이 쿠퍼와 동료들이 나선다.
스타일 자체는 전형적인 아케이드 액션게임이지만 다양한 기술을 써서 건물 안팎, 상하 등 미로 같은 공간을 활용하는 3D게임으로서의 기본은 탄탄하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게 도둑인 주인공에 걸맞은 여러 요소들이다. 예를 들어 <메탈 기어 솔리드> 시리즈에 사용되었던 잠입이나 벽타기 같은 기술은 다른 액션게임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비전서를 나눠 가진 다섯명의 적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조금씩 조각난 책을 돌려받을 때마다 새로운 기술을 하나씩 익힐 수 있다. 지뢰나 섬광탄 같은 공격 기술이 있고, 슬로모션 같은 회피 기술도 있는데 영화 <매트릭스>의 그 유명한 장면을 흉내내볼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게임들의 패러디가 종종 나와서 긴장을 완화하고 웃음을 자아낸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너무 많아. 조금씩 빌려다 모아놓았죠. 우리 게임은 그저 그 정도예요. 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도둑질밖에 없는 녀석이잖아요. 수줍어하는 너구리 한 마리가 보인다. 그런데 알고 보면 속이 시커먼 녀석이다.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손대지 않고 나쁜 놈들 물건만 훔치는 쿨한 도둑이 있고, 사사건건 슬라이의 앞길을 가로막는 섹시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 경찰이 있다. 그리고 물론 세계를 돌아다니며 악행을 일삼는 악당들이 있다. 이런 삼각관계는 이미 수많은 영화와 만화에서 사용되고 또 사용된 구도다. 매 스테이지는 TV애니메이션처럼 ‘1화’, ‘2화’라고 딱지가 붙어 시작되고 제법 충실한 애니메이션 오프닝도 있다. 이어지는 본게임은 풀 3D화면이지만 셸 세이딩 기법을 적절하게 구사해서 오프닝의 2D애니메이션과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만화적 구조에 만화적 대사, 만화적 연출, 마지막으로 하이 퀄리티의 애니메이션까지. 명문 도둑 가문 출신 너구리의 시커먼 속내가 하늘 아래 드러난다. 몇년 안에 TV애니메이션 자리를 빼앗아가겠다는 야심이 당찬 결의다. 우리는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걸 줄 수 있어. 아니, 그 이상이지. 애니메이션은 그냥 구경밖에 못하잖아. 하지만 우리 물건에서는 네가 플레이할 수 있거든. 멋진 액션도 달콤한 로맨스도 직접 경험할 수 있어. 너라면 어느 걸 고를래? 어떡할 거냐구? 그러니까 너구리 눈 주위가 시커먼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가문의 비전서는 겉으로 내세우는 핑계에 불과했다. 슬라이 쿠퍼는 딴 게 아니라 모든 멀티미디어 장르 소비자들의 마음을 훔치려고 파견된 도둑이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