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하게 쉽게 만든 게임이 하나 있다. 일단 시나리오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생체 병기 연구소에서 실수로 괴물을 만들어냈다. 이를 ‘마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연구소를 점령한 마신을 제압하기 위해 용병들이 투입된다. 롤플레잉 게임이라면서 퀘스트라고는 이거 딱 하나뿐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장소라고는 달랑 마신이 숨어 있는 지하 100층 던전뿐이고 시스템도 단순하다. 얼굴, 옷 색깔, 체형, 직업 등을 정해 캐릭터를 만든다. 최대 다섯명까지 파티를 짤 수 있다. 공격에만 전념할 것인지 방어를 우선할 것인지 등등 각각 행동방침을 정해준다. 던전에 들어간다. 적을 만나면 전투가 벌어지고 캐릭터들은 알아서 움직인다. 멍하니 구경하다가 가끔 행동방침을 변경해준다. 그래픽이 떨어지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단순한 시스템이지만 진행은 어렵다. 이미 탐험한 부분은 지도가 만들어진다.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적이 강해진다. 겨우 한층 차이인데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죽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해 일단 줄행랑이다. 다행히 강화인간이기 때문에 지상으로 올라가면 부활시킬 수 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 모험에서 얻은 아이템을 총동원해 장비를 개조, 강화한다. 다시 도전한다. 이제는 해볼 만하다. 그런데 마신의 농간인지 던전은 들어갈 때마다 매번 달라진다. 애써 만들었던 지도가 말짱 소용없다. 다시 시작이다.
<메탈 던전>은 엑스박스용으로 국내에 출시된 첫 번째 롤플레잉 게임이다. 롤플레잉 게임은 한국 게이머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장르다. 처음이니만큼 기대가 컸다. 하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 같다. 게임시장이 많이 커졌다지만 <스타크래프트>밖에 모르는 게이머가 대다수다. 대부분의 게이머들에게 이 게임은 좋고 싫고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게 뭔 놈의 게임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패미컴이나 슈퍼 패미컴 때문에 상급 학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었던 올드 게이머라면 당장 <위저드리>, 혹은 <로그>를 떠올릴 것이다. 맞다. 이 게임은 겉모양새는 SF지만 <위저드리>를 필두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미궁 탐색형 롤플레잉 게임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 게임은 롤플레잉 게임의 원형을 재현하고 있다.
성장과 이야기는 롤플레잉 게임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이다. 이 게임은 그중 성장이라는 한축에만 전적으로 몰두한다. 개조에 개조를 거듭하며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주어진다. 암담하게만 느껴지던 적을 이제는 물리칠 수 있다. 난관에 부딪히며 경험을 쌓고 성장을 통해 이를 극복한다. 단순한 세계관과 시스템 덕분에 성장의 재미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성취감이 극대화된다. 던전형 롤플레잉 게임의 맛을 아는 데 가장 필요한 덕목은 근성이다. 놀랍도록 단순한 하나의 목적을 위해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거는 진지함과 단호함이 요구된다. 성질 급한 사람, 당장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참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게임을 절대 할 수 없다.
엑스박스로 국내에 처음 출시된 롤플레잉 게임이 <메탈 던전>이라는 것은 재미있는 역설이다. 가장 진보된 하드웨어로 가장 오래된 게임 원형이 재현된다.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아넣는 회사가 제일 대중적이지 못한 게임을 내놓는다. 이런 모순이라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하늘을 향해 두팔을 뻗고 대환영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