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 핏 언더> Six Feet Under 캐치온 수,목 오후 10시
사람은 죽음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뜻하지 않은 재난 앞에서, 인간은 운명 앞에 무릎을 꿇고야 만다. 재량 밖을 벗어나는 재난 앞에서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은 혼란에 뒤집혀버린다.
9·11 테러와 같은 해에 출발한 <식스 핏 언더>는 마치 테러를 예고라도 한 듯 죽음에 대한 드라마다. 아버지가 비명횡사하며 얼결에 장의사를 물려받은 두 아들과 엄마, 딸을 둘러싼 이야기다. 불안정한 유부녀 애인을 둔 첫째, 게이라는 것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둘째, 세상살기 귀찮은 것인지 겁나는 것인지 헤매는 셋째, 오십이 넘어 다른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엄마. 이들은 죽음을 통해 갑작스럽게 바뀐 인생 앞에 시행착오를 거치며 살아야 한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각본가가 만든 장의사집 이야기 <식스 핏 언더>. 장의사 가족을 통해 죽음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식스 핏 언더>는 미국 드라마가 세련된 것이 오히려 악재로 작용하는 극단적 케이스다. 밥상머리에서 모든 분쟁이 출발하고, 때로 어머니는 식탁에 앉는 것도 잊어버리고 싱크대 앞에 서서 밥을 먹는- 너무나 사실적인 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세련되기에 역으로 이것이 드라마임을 상기시킨다. <아메리칸 뷰티>가 영화보다는 연극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았을 것처럼, <식스 핏 언더> 역시 연극으로 만들어 배우들의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피부로, 날것 자체로 느끼게 해야 했다. <식스 핏 언더>의 죽음은 지나치게 세련된 매끈한 기법으로 다가옴으로써 역효과를 내고 만다. 저것은 가짜다. 드라마다.
<식스 핏 언더>는 얼핏 보기엔 죽음 앞에서 인간이 평등해지고, 그 평등성 앞에서도 살아가야 함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식스 핏 언더>는 ‘죽음’ 앞에서 평등하지 않다. 한명 죽으면 눈물 흘리는 사람 한 부대가 뒤따라온다. 그것이 더욱 슬프다. 나는 살아남았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식스 핏 언더>의 슬픔과 웃음에 동참하려면, 우리는 ‘죽음의 죄책감’ 앞에 동참해야 한다. 인간은 결국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죄책감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식스 핏 언더>는 의도든 아니든 드라마 자체가 자신이 정한 핵심을 완전히 비켜가버린다. 죽음 자체보다도 죽음에 괴로워 안달복달하는, 하루하루 죽어가는 인간상을 그리고 있으니, 말 그대로 극적인 죽음은 표면상의 이유. 드라마에 비극성을 부여하는 장치일 뿐 어떠한 의미도 없이 증발되어버린다. 이 드라마, 인생을 이끄는 것은 결국 남아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특히 죄책감덩어리 둘째 아들 앞에 나타난다. 이들이 진짜 죽은 사람들인가? 먼저 떠난 사람인가? 아니다. 죄책감의 현신이다. 살아 있는 자들의 그림자다. 죽은 자들이 우리 곁에 있단 얘기를 하고 싶었어도 결국 죽음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는 셈이 되어버린다.
<식스 핏 언더>는 죽음에 대해 담담하지 않다. 죽음의 무게 앞에서 생존의 죄책감에 시달려 약에 의존하고, 섹스에 탐닉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자들의 몸부림이다. 가족도 그 몸부림 중 하나일진대. 사랑과 가족이 이들의 구원일까? 프로작은 괜찮고 대마는 나쁘다? 지나치게 먹으면 무엇이든 독이다. 적정한 선이란 건 있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 죽음이 넘을 수 없는 선임을 깨닫는 것은 죄가 아니다. 넘을 수 없는 선에서 우린 멈추어야 하고, 그 선을 넘는 날까지 그 선 안에서 행복을 찾는 본능에 충실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왜 그 선 앞에 있음을 강조해서 죄책감을 들먹이는가? 3자가 의미부여를 하면 죽음은 이미 죽음이 아니다. <식스 핏 언더>는 지나치게 말하자면 인간미를 찾고자 뛰쳐나갔으나 고상한 척하는 속물주의의 뒷문으로 돌아온 셈이다. 죽음을 인정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죽음이란 혼란 앞에서 모든 것은 뒤바뀌고, ‘망각’은 인간을 다시 재생하게 하는 견인차가 되는 것이 더욱 쓰디쓴 만고의 진리다. 죄책감을 벗어나 세상을 바라봐야 삶의 길이 보인다. 그것이 떠난 자에 대한 진정한 예우이다.남명희/ 자유기고가 zoo@zootv.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