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호에 이어- 모든 일은 예정되어 있었다. 아니,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다. 삼라만상 모든 일이 운명의 시나리오 안에서는 완결되었다. 죽은 사람 사주를 넣으면 그 사람이 죽은 사람이란 것을 맞히듯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그 사람이 언제 죽을 운명인지 사주를 보고 맞힐 수 있다. 맞힐 수 있는 원리는 간단하다. 그 사람은 (미래의) 그날 죽었기 때문이다. 단지 인생을 훨씬 흥미진진하고 리얼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그 연속극의 시청자이자 출연자인 우리는 방영분만을 기억할 수 있는 차원에서 살고 있을 뿐. 게다가 그것이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연속극이란 사실도 모른다. 단지 기억이 순차적으로 주입되고 있을 뿐이므로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나 인생은 과연 흐르는 것인가? 강물을 보면 흐르고 있다라고 여기지만 범우주적 시점에서 보면 지구라는 구형 안에서 순환하고 있을 뿐이듯 ‘진행되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삶도 사실은 시작도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일 수도 있다. 시간이 단선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점은 무의미하다. 다가오는 미래는 오래 전에 지나갔던 과거의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과거만 기억하는 셈이고 몇번이고 지나왔던 길을 언제나 새로운 길인 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내일이 밝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단편적인 기억일 뿐이다. 단지 우리는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과거시제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이며 미래의 사건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여길 뿐이다. 하지만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다. 토탈 리콜. 모든 것은 기억이다. 경험이란 기억할 수 있는 가까운 과거이고 미래는 너무 멀어서 망각된 과거이다. 삶이란 늘 새롭게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기억의 순환일 뿐이다. 우리의 인식 한계 안에서 ‘현재’란 사실상 인식 불가능하다. 당신은 기억이 아닌 순수한 의미의 ‘지금’을 인식할 수 있는가? 10만 광년 떨어진 거리의 별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10만 광년 전의 별일 뿐이며 지금도 존재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듯이 당신이 ‘지금 분명한 현실’이라고 느끼는 모든 환경은 미세한 과거들이다. 즉, 미세한 과거들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연결되는 것인데 그 기억이 너무 가까워 편의상 ‘지금’이라고 할 뿐이다. 10만 광년 떨어진 거리의 별이 지금도 존재하는지 증명할 수 없듯이 지금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과 존재들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증명할 수 없다. 내일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증명할 수는 없다. 내일이 오리라는 인식도 어제의 경험에서 오는 기억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모든 현실은 픽션이다. 기억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탈 리콜>은 잔인할 정도로 완벽한 ‘영화’이다. 대부분의 다른 영화들이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데 역점을 두는 반면 <토탈 리콜>은 영화의 운명인 ‘픽션’에 철저히 충실한 구조로 어떻게 ‘완벽한 픽션’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임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도 어쩌면 완전한 하나의 픽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장자의 나비꿈이 생각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끊임없는 기억의 순환이고 물리적인 실존은 증명할 방법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속의 모든 경험은 사실은 영화 <토탈 리콜>처럼 주입된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저 물리적, 육체적 행위는 하나도 없는 꿈일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 그렇다면 ‘어디서부터가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 진짜 나의 삶인 것이냐’라는 서두의 질문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기억을 앞지를 수 있을까’라는 문장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토탈 리콜. 이 모든 현실이 기억일 뿐이라니. 어렵다. 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www.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