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는 고비를 넘겨 젖히는 가락도 가락이지만 노래말이 참 청승맞다. 심수봉이나 되니까, 아니 산전수전 다 겪은 심수봉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말이요 가락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가 부르니 노래가 되는거다.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껍질이니 뭐니 필요없다는 거다. 부드러운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거다. 사랑은 유치한 거라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닥치면 이렇게 애원한다. “서러운 세월만큼 안아주세요… 당신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어.” 멀쩡한 사람을 그렇게 청승맞고 유치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이다.
사랑에는 긍정적인 힘만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걸 쓰러뜨리는 허무성도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행하는 모든 짓의 끄트머리에는 죽음이 있다. 너무도 빤한 이야기가 되겠는데, 사람이 하는 짓의 궁극 목적은 죽음이라는 말이 여기서 성립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죄다 죽자고 하는 짓인 게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니 사랑도 죽자고 하는 짓이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목숨을 던져야 한다. 뭔가를 사랑한다면 몸을 바쳐야 한다.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 된다. 이것저것 따지고 자시고 할 거 없이, 너로 하여 덕보자는 생각없이, 네 탓에 좋은 세상 살아보자는 맘없이 그냥 그를 위해, 그것을 위해 콱 죽어버려야 사랑하는 것이다.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죽음은 없음이니까 목적이 없는, 무목적적 행위가 사랑이다. 그를 위해, 그것을 위해, 콱 죽어버리는 것은 사랑의 허무성을 몸에 새겨넣는 일이다.
사랑의 긍정적 힘과 허무성이 합해져서 사랑의 숭고함을 만들어낸다. 수많은 사랑 노래, 사랑 이야기, 사랑영화는 숭고함의 한 자락을 체험케 한다. <감각의 제국>의 절정의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가 눕는다. 그가 위에 앉는다. 그는 그의 목을 조른다. 그는 숨이 막혀간다. 그는 죽어간다. 그는 그를 위해 죽는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을 사랑의 순간과 기어이 일치시키고 마는 최고의 행위를 완성한다. 끝은 목적이고 완성인데,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 끝을 써버렸으니 삶을 제대로 끝장낸 것이요, 래디컬하게 완성한 듯하지만 한명이 살아 있으니 절대적 완성은 아니다. 그래도 살아남은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누군가가 자기만을 위해 콱 죽어버리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으니.
장만옥과 양조위가 보여주는 사랑- <영웅>이 사랑영화라는 건 아니다. 하나의 계기만 가지고 규정하자면 <영웅>은 활공영화일 수도, 호수영화일 수도, 바둑영화일 수도, 서예영화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규정하자면 다른 걸 부정해야 하므로 전체적 규정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은 절대적 사랑에 거의 합치한다. 물론 칼이 짧거나 둘 중 한명의 몸이 두꺼웠더라면 그 완성이 어려웠을 테지만.
아무런 이유없이 그것을 위해 죽어버릴 수 있는 것, 그것은 달리 말하면 순수다. 세상 사람들이 순수문학으로 분류해주는 문학을 한다고 해서 순수 문학자가 아니다. 문학말고는 할 게 없어서, 문학밖에 몰라서, 문학 때문에 망가져야, 문학을 위해서 콱 죽어버려야 문학을 사랑하는 거고 순수 문학자인 것이다.
순수학문이라는 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순수성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 공부한다고 나서는 이들이 그것을 위해 콱 죽어버리는 실천은 고사하고, 죽는 시늉이라도 할 생각은 않고, 그걸 가지고 돈을 벌어볼까, 권세를 얻어볼까, 이름을 날려볼까 하면 그는 불순하게 순수학문을 하는 셈이요, 이런 자들이 천지에 널린 탓에 순수학문이 죽어간다. 말장난 아니냐고? 아니다. 순수학문 다 죽는다고 분신한 학자는 없다. 말로만 글로만 촉구하지 몸으로 항거하지 않는다. 순수학문을 위해 콱 죽어버리지 못하는 거다. 이럴 바에는 혼자 즐기자고 학문한다고 하는 게 낫고, 돈벌자고 공부한다고 떠드는 게 낫고, 돈벌이 따로 공부 따로 하는게 차라리 깔끔하다.
대답은 정해졌다. 소설을 사랑한다고? 소설을 위해 콱 죽어버려라. 학문을 사랑한다고? 학문을 위해 콱 죽어버려라. 영화를 사랑한다고? 영화를 위해 콱 죽어버려라. 그를 사랑한다고? 그를 위해 콱 죽어버려라. 조국을 사랑한다고? 글쎄… 누군가 솔범수범할 때까지 기다려라. 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