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세상을 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를 보내는 행사가 2월 마지막 날 서울대병원 앞 공원에서 열렸다. 그가 몸을 누인 목관은 장례식이 시작되기 전 식장을 빙 돌아 캐딜락에 운구되었다. (주)새서울 캐딜락이라는 광고가 씌여진 서울 40 바 10**, 길고 새카만 외제차에 실려 벽제 화장장에 가서 그는 육신을 털어버린다. 유언대로 태어나 자란 충남 보령군 대천읍 대천리 387 관촌마을 땅에 뿌려진다.
그 사람, 소설가 이문구. 향년 62살. 농사꾼, 사법대서사, 배주인이자 남로당 보령총책이었던 아버지는 6·25 발발과 함께 예비검속되었다가 며칠 뒤 후퇴하던 읍면의 치안기관에 의해 처형된다. 둘째 형은 육사 2기로 들어갔지만 위장병을 얻어 자퇴해 돌아와 집안일 거들다가 다른 사람들과 한 오랏줄에 엮인 채 아버지와 운명을 같이했다. 셋째 형은 부친과 연루혐의로 초겨울 밤 가마니에 담겨져 대천해수욕장에서 바닷물에 산 채로 수장되니 그때 나이 열여덜. 큰형은 일제시대 징집되어 도일한 뒤 실종됨. 양반가문임을 평생의 자랑으로 삼은 한산이씨 조부는 집안이 풍비박산하자 난리 속에서 엄동설한에 운명하니 나이 90. 천수를 누렸으나 호상일 수 없었다. 당시 이문구 나이 열살. 3대에 걸친 네 사람의 목숨을 한해 동안에 잃은 어머니는 1956년 나이 쉰에 사망한다.
1978년에 그는 이렇게 가족사를 기록했다.뒤늦게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가 순식간에 장남이자 유일한 손이 되어버린 이문구가 어린 마음에 맨 먼저 다짐한 것이 나만은 절대로 형무소나 유치장 출입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오래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죽은 혈육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임무라고 믿었다. 그가 평생 꺼린 일은 자기 이론을 내세워 남과 토론하는 것. ‘나는 무슨 일에나 중립이기를 희망한다.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원컨대 이 삶이 무의미하지 않기를….’
봄은 어디선가 준비되고 있겠지만 2월 말의 날씨는 밑에서부터 찬기가 올라왔다. 갓 취임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자신의 문단 데뷔에 손을 잡아준 것이 이문구였다고 제일 먼저 짧게 조사를 했다. 이호철 선생은 작가회의 문협 펜클럽 등 등돌리고 살았던 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문인장을 치른 것에 감동하여 우리 모두 한이름으로 뭉치자고, 그것이 이문구가 평생 원한 바라 했다. 펜클럽의 신세훈은 고인이 문학상도 문학비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유골이라도 수습하자고 목청을 높였다. 말석에 어정거리던 내 곁의 한창훈과 유용주, 그의 유해를 운구했고 유골을 부여안고 관촌까지 갈 그들은 어림없는 말씀, 고인의 뜻이 무엇인지 고인의 생이 어떠했는지 모르냐며 작은 목소리로 일축했다.
길게 이어지는 조사를 듣는 것도, 국화꽃 한 송이 한껏 웃는 영정 앞에 놓는 것도 부질없다 싶어 장례식장을 떠났다. 그의 유해가 실린 캐딜락을 슬그머니 쓰다듬고 길을 건너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병을 샀다. 마개를 따서 한 모금을 깊게 들이켠다. 이문구 선생 잘 가시오. 당신 생전에 한번도 차 한잔 술 한잔 같이 옳게 못하고 이렇게 소주 한잔으로 당신을 보냅니다.
이문구씨를 알게 된 것은 20대 초반. 나는 문학기자였고 그는 갈 데 없는 촌놈 문인이었을 시절이었다. 나는 그에게 평생 큰 빚을 졌다. 다른 빚은 내 가슴속에 묻고 평생 곱씹을 터이지만 그 짐승 같은 시절에 외가나 친가에 한명도 목숨잃은 사람없는 내가 세상에, 사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들까분 것이 동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너무 부끄러워 나는 그 앞에 옳게 나서지 못했다.
당신 가는 길에 전 대통령 새 대통령의 화환이 무슨 소용이며 캐딜락이 웬말이오. 게갈 안 난다는 당신 말이 생각납니다. 어차피 관촌에 간들 옹점이 대복이랑 놀던 그 땅 그 모습은 아니겠지요.
그를 보내는 날 해거름에 곁에 앉은 젊은 동료를 끌어내 소주 한잔 진하게 먹으며 너희가 이문구를 아느냐 일갈하고 돌아와 이 글을 쓴다. 몇년 전 조선일보가 제정한 동인문학상을 이문구가 받자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것들이 이문구를 씹었을 때 이놈들아 너희들이 이문구를 아느냐고 소리쳤듯이. 김선주/ <한겨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