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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O.S.T

박제가 되어버린 낭만주의의 자기혐오

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남성형의 <피아니스트>가 전쟁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미하엘 하네케가 만든 여성형의 <피아니스트>(la pianist)는 일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두 영화는 여러 면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는 생존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극단적인 현실 속에서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반면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는 권태롭고 변화없는 유럽의 현대생활 속에서 한 사람의 예술가/일상인이 품고 있는 ‘욕망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둘은 모두 예술가라는 호칭이 부여된 사람들이 현실 앞에서 때로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물론 둘 모두, 이 보잘것없는 시도 자체가 현실에 던지는 의미심장한 파문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는 유럽 문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을 우울하게 만든다. 프랑스영화지만 감독은 독일계고 배경도 음악의 중심지인 비엔나가 등장한다. 그러나 파리건 비엔나건 그 구체적인 장소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주인공이 처해 있는 공간은 유럽 예술(여기서는 음악)의 뿌리깊은 전통을 전수받고 그 마력적인 힘을 몸소 이해하고 있으나 정작 그 뿌리 자체가 잊혀져가고 있는, 망각의 공간이라고 봐도 무방한 공간으로 등장하고 있다. 피아니스트인 여주인공이 결국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혐오이다. 그녀는 엄밀하고 정교한 피아니즘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정통 콘서버토리(음악학교)의 피아노 교수이자 연주자인데, 정작 그녀의 욕망은 SM적인 포르노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이와 같은 변태적인 욕망의 그늘을 슈만이나 슈베르트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광기어린 예술적 추구와도 연관시키려고 하지만 실은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녀의 변태적인 욕구는 비천한 욕망을 자극하는 현대사회의 포르노 산업체계에 영향을 받은 것일 뿐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천재적인 음악가들의 선율은 단지 전통으로만 남아 있다. 그녀는 그 체취를 피아노 건반을 통해 손가락으로 느끼지만 그것을 일상 속에서 체현할 수는 없다. 그녀의 피아니즘은 박물관에 박제된 공룡 뼈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은 자기혐오로 빠지고 이 자기혐오는 다시 ‘자기 학대’로 이어지며 자기 학대는 결국 SM적인 욕망으로 결과된다.

아뿔싸, 유럽의 현실은 슬프다. 미국이 일으키려는 전쟁을 막아보려 하지만 그것은 ‘배은망덕’으로 취급될 뿐이다. 유럽 대륙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실어간 미국은 지금 아버지처럼 명령하고 유럽 대륙은 더이상 실어갈 것이 남지 않은 빈 창고 같다. 아주 뿌리깊게는, 이 영화가 반영하고 있는 유럽인의 의식에 그런 것들이 깔려 있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의 자존심이 거기서 머물 리는 만무하다. 이 영화는 실제로 ‘음악 자체’를 통해서 그 화려했던 낭만주의 천재들의 멜로디를 슬프도록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다. 그것 자체가 유일하게 남은 힘이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친구들은 어디 가고 나는 왜 이 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을까’라는 가사. 이 천재의 멜로디는 여전히 빛난다. 비틀스는 저리 가라다. 바흐의 평균율, 엄정하고 엄숙하다. 쇼팽의 환상곡, 흰 건반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다. 아, 이 아름다운 것들은 다 어디 갔을까.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