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가벼운 입 때문에 고생한 친구가 있다. 곁에선 그냥 그러려니 해왔지만 본인은 그로 인해 낭패를 본 적이 많은 듯 자신의 입을 쥐어뜯으면서 항상 이게 말썽이야 하곤 했다. 그가 이러한 자책감을 버리고 최근 당당한 이론을 개발해냈다. 사람의 말이란 방귀와 같아서 자신도 제어 못하는 사이에 터져나오는 것이니 무심코 한 말에 대해 일일이 책임을 질 수도 없으며 자책할 필요도 없다는 방귀이론이다. 대부분의 말은 본마음과 상관없이 임기응변이나 즉흥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방귀에 대해 항문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처럼 말에 대해서도 정신이나 인격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자신의 말 때문에 감정을 상하거나 상처받지 말고 혹시 말실수를 하더라도 슬쩍 뀐 방귀거니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못 말리는 방귀쟁이이기도 하다.
그럴싸하게 들리긴 했지만 동의하긴 어려웠다. 평생 방귀를 화장실 외에선 뀌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방귀를 뀌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연애 시절 한번도 방귀를 뀌지 않았던 사람이 남녀를 불문하고 결혼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귀를 뀌어대는 것을 보면 방귀도 어느 정도 절제할 수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노력하면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사람의 말이란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 자체로서는 신통하다 해도 그 글을 쓴 사람을 무조건 신뢰할 수 없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같이 살아봐야 사람을 알게 된다고 하지만 궁금한 사람마다 붙잡고 살아보자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평생 같이 살아와서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남편이나 아내가 어느 순간 기절할만큼 놀랄 일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은 것을 보면 살아봤자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사람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이 일을 해보는 것이다. 한 직장에서 동료로서 일을 해보면 능력의 고하에 상관없이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지만 사람 알자고 모든 사람과 같이 일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것도 간단한 게 아니다.
말과 글 때문에 흥미를 느꼈던 사람을 직접 겪어보았을 때 실망하는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말과 글은 방귀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방귀와 같은 말과 글은 세상에 널려 있다. 소리나는 방귀는 피해갈 수도 있지만 소리도 안 내고 거의 똥 수준에 가까운 방귀를 뀌면서 주변을 혼란시키는 사람들도 많다. 냄새와 해악이 지독하다. 의사들은 방귀는 건강과 별 상관관계가 없으며 어떤 똥을 누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어떤 똥을 누느냐에 따라 육체의 건강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인격과 정신의 건강상태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백마디 말보다 한번의 행동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번의 그럴싸한 행동을 하기 위해 말을 아끼는 것도 문제다. 연인이나 부부관계를 보아도 한번의 근사한 행동을 하기 위해 사랑한다는 말이나 감언이설을 아끼면 관계가 깨지고 만다. 누가 그 깊은 심중을 알 것인가. 어차피 말과 글, 방귀는 모두 정신과 육체의 배설행위다. 평생 방귀 한번 안 뀌고 말실수 한번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때와 장소를 가리고 상대를 가리고 결정적인 해악을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만 갖는다면 방귀뀐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숱한 이름이 여기저기 이 자리 저 자리에 오르내리고 있다. 말과 행동 모두 오리무중이었던 사람, 방귀 같은 글과 말로만 살아온 사람, 방귀나 말조심은 잘해왔지만 거의 설사에 가까운 똥을 질질 흘리고 다녔던 사람, 방귀는 가끔 뀌었지만 결정적일 때 건강한 똥만 누었던 사람, 방귀소린 요란한데 항상 변비에 걸린 것 같은 행동만 했던 사람, 픽방귀도 한번 꾼 적이 없어서 전혀 감이 안 잡히는 사람, 천차만별 각양각색이다. 방귀쟁이 친구를 둔 탓에 갑자기 유능한 방귀감별사가 된 듯하다. 김선주/ <한겨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