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열린 티나 터너의 콘서트에서 이 미국인 흑인 스타가 관중을 향해 묻는다. “무엇을 원하죠?” 이에 사람들은 답한다. “식량이오!” 터너가 다시 “필요한 게 뭐예요?”라고 묻자 이번에는 “달러요!”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문라이팅>에 잠깐 나오는 이 장면은 이 이야기의 시공간적 출발점이 되는 1980년의 폴란드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던가를 넌지시 알려준다. 식료품을 비롯해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엄청나게 뛰어오르며 불안하기만 한 경제상황 아래서 인민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거칠게 터져나오던 게 당시의 폴란드였다. 그 결과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전국 규모의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고 이로써 자유화·민주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쳤다. 바로 그럴 때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폴란드는 꽁꽁 얼어붙은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속 대사에서 인용하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음울하고 절망적이었던 폴란드의 겨울”이었다. <문라이팅>은 폴란드 출신의 명민한 영화감독 예지 스콜리모프스키가 조국의 이런 힘든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낸 영화다.
망치, 드릴, 도끼 등 세관의 의심을 살 만한 도구들을 가방 속에 넣은 네명의 폴란드인 남자가 바르샤바를 떠나 런던에 당도한다. 이들은 폴란드인 사장이 런던에 가지고 있는 집을 수리하기 위해 이 낯선 땅에 온 것이다. 남자들은 폴란드에서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가 있고 또 사장쪽에서는 영국의 현지인들을 고용하는 것보다 적은 비용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이건 양쪽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이다. 이 남자들이 타국 땅에서 묵묵히 일을 해가는 도중에 폴란드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된다. 이들은 당장 폴란드에 돌아가는 건 고사하고 연락마저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아는 이는 리더인 노박(제레미 아이언스)뿐이다. 일행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그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동료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공사를 진행해 간다.
영화 속의 네명의 폴란드 남자는 모두 이방인이긴 하지만 이 낯선 땅에서 실제로 방황의 몸짓을 보여주는 것은 노박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만이 아픈 진실을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홀로 일종의 방향상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표가 없는 부조리한 세상에 갇혀서 그 안을 헤매다니는 존재- 전형적인 스콜리모프스키적인 세계의 주인공- 가 된다. 결국에 그는 주위의 모두로부터 고립되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는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런던이란 낯선 땅과 불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일행들에게서마저도 차츰 소외된다. 설상가상으로 폴란드에 있는 그의 아내도 어느새 그를 배신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새어나오게 만든다.
어떤 면에서 <문라이팅>은 고립과 소외로 빠져들게 되는 한 남자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들여다보는, 다분히 실존주의적인 영화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노박의 어쩌지 못하는 상황은 조국의 위기와도 관련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폴란드를 벗어나 잠시 타국에 머물러 있긴 해도 그의 행보는 폴란드의 정치상황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라이팅>은 분명히 정치적 코멘트가 게재된 영화, 혹은 정치적 알레고리의 영화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노박은 어떤 면에서는 억압자의 위치에 자리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자기 시계만이 정확하도록 조작하거나 동료에게 온 편지를 소각함으로써 ‘검열’을 시행한다. 아니면 노박은 폴란드의 정권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멀리 있는 사장(즉 소련)의 원격조종을 받는 듯한 그는 그 지시에 따라 동료들(폴란드의 인민들)을 ‘동원’한다. 이런 식의 해석들은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긴 하지만 영화는 또한 절대로 이런 도식적인 해석의 틀에 완전히 갇힐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이걸, 노박이란 인물을 추상화의 수준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육화(肉化)라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생생한 묘사에 가닿게 함으로써 조용히 증명해낸다. 예컨대 노박은 아내를 애타게 그리워하면서도 영국 여자를 꼬심으로써 외로움을 해소해볼까 생각하기도 하는 ‘인간’으로서 그려지는 것이다.
<문라이팅>은 정치적 억압의 현실을 자재로 부조리한 세계를 만들어내고는 그로부터 기원하는 두려움과 고독과 절망의 문제를 때로는 유머를 가지고, 또 때로는 놀라며 바라보는 영화다. 이건 스콜리모프스키의, 현실을 보는 자로서의 자질과 스토리텔러로서의 자질이 모두 드러나는 영화라고 달리 표현해도 될 것 같다(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이 영화의 DVD는 헬렌 미렌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쥐어준 <칼>(팻 오코너, 1984), 베를린영화제 수상작인 <아름다운 청춘>(보 비더버그, 1995)과 함께 ‘유로피안 어워즈’ 박스 세트로 출시되었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Moonlighting 1982년감독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출연 제레미 아이언스자막 한국어오디오 돌비 디지털 모노화면포맷 4:3 풀스크린출시사 스펙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