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검은 가죽 드레스를 입고 인조 속눈썹을 단 보랏빛 눈동자의 여자가 나타난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 사이에 뿔도 나 있는 것 같다. 로또 복권 1등 당첨 번호를 알려줄 테니 대신 앞으로 눈과 귀와 입과 코 중 세개를 자기한테 주고 나머지 하나만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당연히 눈을 고른다. 다른 것 없이는 어찌어찌 버텨도 눈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눈으로는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도 하고 소리도 듣고 냄새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는 맥주를 마실 수도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상대의 심장에 칼을 꽂을 수도 있고 저만치 떨어져 있는 사람의 몸을 핥을 수도 있다.
<수퍼 걸델릭 아워>는 버라이어티 TV쇼를 보는 것 같은 게임이다. 허리가 없는 유아 체형의 안짱다리 네코, 가느다란 눈을 살짝 내리깐 코코, 통통한 핑크빛 뺨의 토코, 저렇게 큰 가슴으로도 잘도 뛰어다니는구나 싶은 쿠마. 착 달라붙는 동물 옷을 입은 여자아이 네명이 여러 가지 시합을 벌인다. 별로 대단한 것들은 아니고 파이 던지기, 두더지 잡기, 줄넘기처럼 가벼운 미니 게임들이다. 네명 중 하나를 골라 토너먼트를 벌인다. 이기면 이길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돈도 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옷이나 장신구를 사서 단장을 하고 다시 다음 시합에 나간다. <비씨 바씨 챔프>처럼 미니 게임을 모아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주는 게임이 있다. 하지만 <수퍼 걸델릭 아워>는 아니다. 이 게임에 게임성이란 게 있다면 그건 다른 데 있다.
<수퍼 걸델릭 아워>에는 리플레이 모드가 있다. 다른 게임에도 얼마든지 있지만 이 게임에서는 각별하다. 리플레이 모드야말로 <슈퍼 걸델릭 아워>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다. 이미 플레이한 게임장면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지만 아까와는 전혀 달라 보인다. 플레이할 때는 조작하기 편하도록 적절하고 안정적인 카메라 워크를 보여주었지만 이번에 카메라는 현란하게 움직인다. 가슴, 엉덩이, 그리고 다리 사이를 번갈아 클로즈업한다. 가슴은 위에서 45도 정도로 잡아 최대한 많이 드러나도록 한다. 숨을 몰아쉬거나 아니면 앞으로 허리를 굽힐 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절대 뻣뻣하게 서 있지 않고 항상 살랑거리는 엉덩이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다리 사이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각도로 비춘다.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정교한 텍스처를 동원해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한술 더 뜨는 게 앨범 모드다. 리플레이 모드를 넋놓고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카메라 시점을 조종해 원하는 각도, 원하는 장면에서 사진을 찍는다. 언제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몇번만 해보면 금방 통달할 수 있다. 기왕이면 마음에 드는 옷을 사다 꽃단장을 시키자. 토끼옷이나 곰옷이 싫증났다면 반바지에 티셔츠는 어떨까? 수영복은 너무 비싸서 당장은 못 살 것 같다. 커다란 꽃모양 선글래스를 고르고 모자도 씌웠다. 칸막이 뒤 실루엣을 감상하며 갈아입기를 기다린다. 음악도 묘한 분위기다.
스크린 위에서 시선은 그렇게 자유롭게 상대를 벌거벗기고 탐닉한다. 관음증의 과실에 취하면 취할수록 끊을 수가 없다. 이미 즐겁지 않아도, 오히려 구역질이 나도 멍하니 보고 있는다. 핏발이 선 눈을 통해 마음이 흐려지고 더러워진 마음으로는 다시는 눈이 맑아지지 않는다. 자기의 시선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