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순표 드라마를 벗어나고 싶었다"
<눈사람> MBC 매주 수·목밤 9시55분매주 월·화요일 남성들의 귀가시간을 앞당겼다는 <야인시대>가 ‘반공시대’로 정신없이 치닫는 사이, 수요일과 목요일 안방에는 푸짐한 잔칫상이 차려졌다. 시청자들은 <눈사람>과 <올인>과 <장희빈>이라는 접시를 앞에 놓고, 어떤 것에 먼저 젓가락을 대어야 할지 고민하는 특별한 즐거움을 만끽했다. 세 드라마에 오랜만에 TV에 모습을 드러낸 스타급 배우들이 제각기 포진한데다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뽐내는 탓이다.
그러나 드라마를 만드는 이들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대중들의 반응, 즉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청률 때문에 간이 졸아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역사물을 만드는 데 남다른 솜씨를 보였던 KBS는 ‘영원한 안방 스타’인 장희빈을 시대 감각에 맞게 재조명해 일찌감치 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초반 20% 안팎을 유지하던 <장희빈>의 시청률은 <눈사람>의 등장으로 하향곡선을 그렸다. <눈사람>에는 잘생긴 남녀 주인공은 없었지만, 공인된 연기파 배우들의 불 뿜는 연기가 시청자들의 넋을 쏙 빼놓았었나 보다. <눈사람>은 SBS가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라는 <올인>이 등장한 뒤에도 예상 밖으로 선전했지만, 타고난 승부사의 인생역정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면서 시청률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창순표 드라마 맞아?"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 한국의 시청자들은 대체 ‘어떤’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일까? 고민 끝에 <눈사람>의 이창순 PD를 만났다. 왜 하필 이창순 PD냐고 묻는다면, 그가 <신데렐라>와 <애인>을 비롯한 전작들을 통해 남다른 ‘대중적 감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가 전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눈사람>을 2003년 필모그래피에 올려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읽어낸 ‘대중’과 그가 미처 읽지 못한 ‘대중’은 무엇일까. 어쩌면 이창순 PD를 통해 앞서 던진 질문의 답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서 `고아`가 된 연욱이가 어떻게 자신을 추스르고 씩씩하게 살아남는지 꾸밈없이 보여주고 싶다"는 이창순 PD는 <눈사람>에서 드라마틱한 장치들을 지양하고 다큐적 담담함을 전략으로 내세웠다.
“이창순이 만든 거 맞느냐고, 1·2부가 나가고 나서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아마 작가의 색깔이 많이 드러나서 그랬을 거예요. 그동안 저는 적극적으로 대본에 개입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거든요. 내 방식대로만 이야기를 풀지 말고, 좀 다르게 해보자. 그래서 연륜은 있지만 미니시리즈를 안 써본 작가와 작업했고, 의견을 최대한 수용했어요. 필승(조재현)의 직업이 형사가 된 것도, 작가가 전체적으로 드라마가 무거울 수 있으니까 역동적인 신이 들어가줘야 한다, 그래서 찬성한 거고. 이창순이 액션신 찍는다니까 좀 이상하죠?” (웃음)
그가 ‘이창순표 드라마’에서 벗어나기로 한 건, 지난해 <가을에 만난 남자>를 끝내고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박상원과 이승연이 주연을 맡았던 <가을에 만난 남자>는 이창순 PD의 작품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흥행에 실패했다. 대중적인 호응이야 그렇다치고, 신인배우를 멋지게 키워냈다든지, 새로운 소재를 독특한 방식으로 요리했다든지… 뭔가 스스로에게 위안할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단 한 가지도 찾을 수 없었단다. “모든 면에서 진부했다”고, “완전히 실패한 드라마”라고, 그는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런 그가 오랜 숙고 끝에 선택한 것이 바로 <눈사람>이다.
“놀랐죠. 1, 2부에 대한 반응을 보고. 아, 요즘 사람들은 디테일한 것보다는 젊고 빠른 것에 열광하는구나. 근데 불안했어요. 제 드라마가 십대 취향은 아니잖아요? <애인>도 그랬고. <눈사람>도 20대 후반 이상 돼야 공감할 수 있을 텐데. <눈사람> 마니아가 생겼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분들에게는 참 고맙게 생각하지만, 저는 드라마가 마니아를 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PD는 독립영화감독이 아니잖아요. 더 많은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면서, 어느 정도 신선하고 의미있는 얘기도 풀어놨다, 그럼 성공한 거죠.”
시청률이 드라마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지만, 방송사에서 꽤 많은 보수를 받는 PD가 소수를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건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다. 그렇다면 <올인> 등장 이후 하락세를 보이는 시청률에 대해, 이창순 PD는 어떤 해석을 내렸을까.
“드라마는 판타지잖아요. <애인>은 불륜 이야기인데, 저럼 안 되지 하면서 나도 저렇게 멋진 애인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잖아요. 형부를 사랑하는 처제는 새로운 설정이지만, 그걸 보면서 나도 형부를 사랑하고 싶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눈사람>을 기획하면서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올인>을 보면 이병헌이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인생을 건 도박을 하잖아요. 시청자들은 이병헌의 모습을 보면서 짜릿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거고요.”
세상이 연욱이를 버릴지라도
극적인 상황을 만드는 데 집착하지 않은 것도 이유라고 했다. <눈사람>의 매력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을, 연기자들이 마치 실제 인물인 듯 열연한다는 데 있다. 인물들의 감정선이 하나하나 살아 있고, “형부, 똥 눴어?”처럼 꾸미지 않은 대사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이창순 PD가 <눈사람>을 ‘다큐멘터리 같은 드라마’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예를 들어 언니가 죽는 장면에서, 연욱이(공효진)가 언니와의 즐거운 만남을 상상하는데 언니는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 간다, 이 두 장면을 숨가쁘게 교차편집해서 보여주면 상당히 극적인 느낌이 들겠죠. 근데 그냥 언니랑 통화하다가 사고당한 언니한테 달려가고 울고…, 좀 심심하지만 <눈사람>은 그래요. 벤치에 선남선녀 앉혀놓고 비 뿌리고, 배경음악 흘리는 게 <애인>에 적합한 방식이었다면, <눈사람>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니까, 거기에 맞는 방식이 있는 거죠.”
연욱이가 형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고 언니마저 세상을 떠나버린 지금, <눈사람>에서 아슬아슬한 극적 설정을 기대하는 것은 조금 더 힘들어졌다. 결과가 더 나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이창순 PD는 급작스레 극적인 방식을 동원해가며 드라마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눈사람>의 주인공은 연욱이예요. 조재현씨가 들으면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드라마에서는 언제나 사랑받는 쪽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니까. (웃음) 연욱이는 조실부모하고 언니마저 잃고, 형부와 조카가 유일한 가족이지만 형부를 사랑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세상에서 ‘고아’가 된 연욱이가 어떻게 자신을 추스르고 씩씩하게 살아남는지, 심지어 엽기적인 행동을 보이면서까지 ‘살아내는’ 과정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에, 이창순 PD는 IMF 이후 대중들이 변했다고 했다. 예전에는 현실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드라마도 잘 봐주었는데, 이제는 TV를 통해 힘든 것, 우울한 것, 슬픈 것들을 결코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결코 <눈사람>에 대한 변명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오랫동안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온 관록있는 PD답게, 그는 <눈사람>의 매력과 한계를 정확히 바라보고 책임지려 했다. 그렇다면 이창순 PD와의 만남 뒤에 내린 ‘지금 한국의 대중들이 열광하는 드라마’에 대한 결론은? 아무래도 이창순 PD의 다음 작품이 그 대답이 될 것 같다고, 속으로, 나 혼자만 들리게 외쳐본다. 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
놓치기 아까운 이창순 PD의 말들" 모니터 보다 내가 울었다 "
이창순 PD의 배우 자랑
조재현이 아내를 잃고 통곡하는 연기를 하던 날, 나는 ‘주책맞게’ 현장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자기가 찍는 드라마를 보면서 운다는 게 ‘쪽팔려서’ 감추느라 혼이 났다. 조재현은 너무나 훌륭한 연기자다. 공효진은 끔찍하게 잘한다. 오연수도 마찬가지고. 김래원은 좋은 멜로 연기자가 될 것이다. 다시는 이런 캐스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완벽한 캐스팅으로, 이 정도 성적밖에 못 낸다는 것이 연출자로서 미안하다.
이창순 PD가 말하는 ‘여성’
내 드라마에서 여성들이 존중되고 있다는 느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힘을 가진 사람들로 비쳐진다면(이건 기자의 질문이었음) 그건 아내(원미경) 덕택일 것이다. 아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예민하고 복잡한 사람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여성에 대한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