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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를 모델로 내세운 핌(Fimm) 광고
황선우 2003-02-13

TV/ 방송가

놀라웠으므로, 계속 놀라워야 한다

그럼 그렇지.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SKT가 여기저기서 ‘쭈운’(준·june)을 외치며 무선멀티미디어서비스 시장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고 있을 때 한동안 KTF는 잠자코 지냈다. 경쟁에 살고 경쟁에 죽는 이동통신시장의 양강인 SKT와 KTF가 맞불을 놓지 않다니….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반격의 시기가 하도 늦어지다보니 심지어 ‘너 다 해먹어라’라며 포기한 것 아니냐는 추측마저 자아냈다.

그런데 역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눈에 독기를 품고 칼을 벼리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쉬쉬’ 하며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놓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서태지. KTF는 어느 날 갑자기 준의 경쟁브랜드인 핌(Fimm)의 모델로 32억원이란 천문학적 액수를 주고 서태지를 영입했다고 발표한 뒤 우렁찬 목소리로 ‘공격 개시!’를 터뜨렸다.

야심찬 프로젝트를 세우고, ‘일급비밀’이란 명분 아래 007작전을 벌이듯 이를 구체화하며, 무슨 깜짝쇼처럼 ‘빵’ 터뜨리는 일련의 과정은 언제 보아도 흥미진진한 것 같다. 특히 이번 경우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묵직한 서태지가 주인공으로 나섰으니 촉각을 바짝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영예의 수상자를 발표하기 직전 흥분을 고조하는 북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심장박동 수를 높이며 개봉을 기다렸다. 한데 대단한 무엇을 예고하는 프로젝트의 함정은 전희가 너무 짜릿하다는 데 있다. 그 순간 이미 절정부에 오르기 십상인 것이다. 결과물이 기대의 아귀에 딱 들어맞는다면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삐걱거리면 허망하게 김이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서태지 주연의 핌 CF는 어땠을까.무명모델 전략의 준 CF에 대해 그냥 빅도 아닌 비기스트(biggest) 모델로 전세 뒤집기를 시도한 이 광고는 일단 속전속결로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채로운 브랜드와 재기발랄한 CF 형식으로 승부를 건 준 광고와 달리 핌 CF는 서태지란 걸출한 모델에 대한 시청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고 있다. 흑백 화면으로 다큐멘터리의 효과를 살리면서 실제 같은 허구의 상황을 연출한 것부터가 그러한 목표를 겨냥했다.

제작연도 2003년 광고주 KTF제품명 핌(Fimm) 대행사 웰콤제작사 매스메스에이지(감독 박명천)

배경은 공항. 서태지가 경호원의 호위 아래 출입구를 빠져나오고 있다. 입국할 때마다 늘상 열혈팬의 환호를 받아온 그가 이번엔 뜻밖에도 계란 세례 같은 푸대접을 받는다. 팬의 아우성이 어지럽게 교차되는 가운데 차가운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없다면 나타나지도 마라.’

서태지의 얼굴과 ‘서프라이즈’(surprise)란 슬로건이 방점을 때리면서 광고는 막을 내린다.무슨 메시지를 전하려고 의도했는지는 쉽게 감이 온다. 놀랍지 않은 것은 보여주지 않겠다는 무선멀티미디어서비스 ‘핌’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놀라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성우의 강렬한 목소리 덕분에 ‘서프라이즈’란 슬로건도 귀에 쏙쏙 박힌다.

서태지를 모독하는 서태지 주연의 CF란 틀거리엔 역발상의 파격도 담겨 있다. 서태지가 계란을 맞으며 입국을 거부당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상황일 터이다. CF 모델로 희소가치가 높은 서태지에다가 언뜻 서태지의 신화를 망가뜨리는 것 같은(결국은 그 신화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지만) 설정은 충격요법으로 최선의 카드를 뽑았다는 인상을 준다.

일각에서는 기본 스토리가 96년작인 신세계 CF ‘윤복희’편과 유사하다며 참신성 측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신세계 광고는 당시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공항을 빠져나오다가 계란 세례를 받으며 수모를 당한 1967년 사건을 재연하면서 ‘꿈과 용기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슬로건을 전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두 광고 모두 같은 광고대행사의 작품이라서 ‘자기복제’의 혐의도 받고 있다. 칭찬일색이어도 모자랄 판에 이같은 소리를 듣는 제작진은 ‘신세계 광고가 구습타파의 메시지라면 핌 CF는 새롭고 놀랄 만한 것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며 ‘엄밀히 컨셉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을 백번 수긍하더라도 이 CF는 솔직히 기대만큼 ‘서프라이징’하진 않은 것 같다. 낯익은 아이디어라서가 아니라 서태지 CF의 장점과 한계를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서태지 주연의 광고는 늘 골리앗 모델의 거창한 아우라에 구속당해 상업적인 열의를 제대로 발현하지 못해왔다. 문화혁명가인 서태지는 90년대에도 그랬고, 현재도 변함없이 새로운 것만이 세상을 바꾼다는 기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을 뺀 서태지는 상상할 수 없어서인가. 연기자처럼 광고에 맞게 이미지를 변주할 순 없더라도 특정 CF 안에서만 독자적으로 빛을 발하는 서태지의 또 다른 얼굴이 없다는 것은 유감스럽다. 이번에는 계란을 얻어맞는 등 예전 CF에 비해 우상답지 않은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그러나 전혀 동요없는 그의 표정과 동작은 여전히 친근하게 눈높이를 맞추기에는 쉽지 않은 엄숙한 무게를 뿜어낸다.

과연 다음번 핌 CF는 2003년, 지금 이 순간에 걸맞은 ‘서프라이즈’ 서태지의 모습을 찾아낼지 궁금하다.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