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친구>의 한 장면. 유학을 떠나는 친구 상택(서태화)을 위해 준석(유오성)이가 마련한 술자리. 누군가 “니 18번 한번 불러봐라” 하자 준석은 친구의 앞날을 축복하며 멋지게 한 곡조 뽑는다. 그 순간! 양복 입은 아저씨 등장하며 한마디! “그런데 ‘18번’이란 말은 일본말에서 온 속어라고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가부키 집안에 전해오던 ‘18번의 인기 연주곡 목록’에서 생겨난 말이지요. 순화해서 써야 하는 말이니만큼 앞으로는 18번이 아니라 ‘애창곡’이란 표현으로 바꿔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자취를 감춘다.
분명히 방송은 되는데 TV편성표에는 제대로 등장조차 하지 않는 1분짜리 프로그램. 바로 KBS와 MBC의 우리말 프로그램 <바른말 고운말>과 <우리말 나들이>이다. 세상에, 1분이라니. 웬만한 CF 방송시간보다도, 뉴스 한 꼭지의 길이보다도 짧은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일상에서 발견되는 잘못된 언어습관에서부터 자사 프로그램에서 잘못 사용된 우리말의 예까지 콕 집어 골라낸다. 영화의 한 장면이나 직접 제작한 단막극을 이용해 지루한 내용을 재치있게 전달하는 구성도 돋보인다. 그 짜임새 덕분에 1분이 그다지 짧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아홉 돌을 맞은 MBC의 <우리말 나들이>는 아나운서들이 직접 연출과 촬영, 조명, 연기까지 도맡아 명실상부한 ‘아나운서국 특허 제작물’로서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교통방송에서 흔히 듣게 되는 인터체인지나 톨게이트를 ‘나들목’으로 바꾼 것도, ‘일체’와 ‘일절’의 올바른 용례를 보급시킨 것도 이들의 작은 공적이다.
무늬만 공영방송인 공중파 방송들에서 ‘말’에 대한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글을 바르게 사용하자는 제안에 시비를 걸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들이 권하는 고운 우리말이란 것이 오로지 국정 ‘표준어’에만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8번’이나 ‘야메’ 같은 ‘후루꾸 일본어’를 우리말로 바꾸자는 주장은 새삼스레 재론할 것도 없지만, ‘가끔씩’도 잘못됐고, ‘고집스런’, ‘조심스런’도 틀린 표현이며, ‘싸래기눈’은 사투리니 고쳐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면 그야말로 말문이 막힌다. 편집증에 가까운 이런 지적을 매일 듣고 있자면 이들의 목적이 고운 우리말을 쓰자는 것인지, 표준어만 쓰자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표준어란 “교육적, 문화적인 편의를 위해 한 나라의 표준이 되게 정한 말.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고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표준어는 ‘편의’를 위해 정한 말일 뿐, 그 자체로는 고운말이나 바른말이라는 뜻을 포함하지 않는다. 단지, ‘교양있는’이란 지극히 모호한 단서를 붙여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느슨한 정의와는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서 표준어라는 기준은 엄격하면서도, 편향된 검열도구로 작용하기 일쑤다. 대통령이 아무리 “갱제, 갱제” 해도 못 본 체하면서, 인터넷 언어의 오염은 참지 못하는 것이 이 기준이며, 난수표 같은 법조문에는 손도 못 대면서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사투리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이 교양있는 서울말의 기준인 것이다. 그 표준화의 결과, 사람들이 아무리 [효꽈] [짜장면]이라고 해대도 뉴스 앵커들은 [효과] [자장면]이라고 한없이 부드럽게 말한다. 부드러워서, 너무 부드러워서 가려울 지경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들이 고압적인 공무원식 자세로 표준어 사용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손한 태도로 우리에게 표준어 사용을 제안할 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예의를 차려 말해도 그 제안이 일방적일 때 폭력성을 띠게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채팅 언어의 오염에 대해 광분하는 신문 사설의 논조나 젊은 것들의 싸가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에 개탄하는 노인네들과 이 프로그램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가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오염’과 ‘순화’이다. 요컨대, 현실의 말은 오염되었고, 저기 어딘가에 순화된 말이 있으니 그것을 끄집어다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순화된 말과 오염된 말 사이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공식어와 비공식어의 구분, 다수의 말과 소수의 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항상 전자는 후자의 속도와 방향을 따라잡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통일시키려 애쓴다. 느려터진 한글사전의 잣대로 변화하는 언중의 말 전체를 판가름하고자 하는 시도의 난센스. 아름다운, 고운 우리말을, 아니 표준어를 쓰자는 주장. 이 부드러운 언어의 파시즘을 누가 말릴 것인가김형진/ 자유기고가 ofotherspac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