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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밖에 없는 천사?
2001-04-26

컴퓨터 게임 | <엑스 박스>

닌텐도, 소니, 세가의 일본 3사가 지배하던 비디오 게임기 시장에 난데없이 마이크로소프트가 선전포고를 했을 때 게임 관계자들은 코웃음을 쳤다. 내세울 건 돈밖에 없는 마이크로소프트가 20년의 노하우와 영향력 앞에서 뭘 할 수 있겠냐는 거였다. 사람들의 기대는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크고 둔탁한 하드웨어 디자인부터 혹평을 받았고, ‘엑스 박스’로 출시될 게임들도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범작 이상으로 평가하기 어려웠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늘 하던 대로 게임제작팀을 여기저기 사들였지만 큰 회사는 없었다. 대부분의 게임 애널리스트들은 엑스 박스는 비싼 수업료만 내고 물러날 거다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바뀌었다. 변화는 일본의 불황에서 비롯했다. 버블 붕괴 이후 누적된 경기침체는 한계에 다다라 이제 금융위기를 촉발할지 모를 상황이다. 경기진작을 위한 일본 정부의 정책도 불황에 따른 소비심리 약화를 상쇄할 수는 없었다. 소비축소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특히 게임시장 전체의 축소를 가져왔다. 이미 지난해 말부터 메이저급 게임사들의 수지악화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그중 일부는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시장은 축소되었지만 제작비는 오히려 증가했다. 100만장 팔아도 겨우 본전치기밖에 안 되는 게임들이 많다. 게임기 스펙이 높아지면서 그래픽이나 사운드 파트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메이저급 제작사는 한해에 서너개 만드는 게임 중 한편만 성공해도 되지만, 중소 규모라면 한해 한편에 회사의 사활을 걸어야 한다.

올해는 상황이 더 나쁘다. 일본 최고의 게임메이커 남코는 사상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고, <파이널 판타지>의 세계적인 제작사 스퀘어도 자금부족으로 회사 매각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드림캐스트>를 만들었던 세가는 누적되는 적자를 견디다 못해 결국 하드웨어 제작을 포기해 버렸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의 경우 지금 판매량은 엄청나다. 하지만 속사정을 알고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발매 일년이 되었는데도 100만장 이상 팔린 게임은 단 한편이다. 그런데다 개발툴과 환경이 열악해서 게임 하나의 제작기간은 전보다 두세배는 족히 길어졌다. 닌텐도의 경우 경영이나 매출은 비교적 좋은 편이지만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독재적으로 관리하고 이윤을 공정하게 나누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작은 회사는 물론 이름있는 대규모 제작사들의 앞날도 절망적이다. 사면초가의 제작사들 앞에 이런 조건을 내밀면 어떨까? “개발툴이나 개발환경, 사용을 위한 개발자 교육, 제작비 지원, 투자 등을 패키지로 제공합니다.” 아마 천사를 만난 기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천사는 물론 있는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마이크로소프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파격적인 조건들을 일본 메이저 회사들에 제시했다. 일년 전과 달리 많은 업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고, 이제 일본 시장에서 엑스 박스가 실패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애널리스트의 숫자는 반으로 줄었다.

몇년간 공들인 끝에 PC게임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마이크로소프트는 이제 PC게임 시장보다 훨씬 큰 비디오게임 시장을 노리고 있다. 험악한 시장에서 예전의 적이나 아군, 입장과 믿음은 중요하지 않다. 동반자가 될 자격이 있는 건 살아남을 돈을 줄 수 있는 사람뿐이다. 이쯤 되면 일본경제의 불황 뒤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있다는 음모론이 나올 법도 싶다. 박상우 | 게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