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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컬트,
2003-01-29

세상은 요지경

“저한테 귀신이 7명이나 붙어 있었대요. 그거 다 떼고 왔어요. 아주 용한 분 계시는데 소개해드릴까요” 오랜만에 연락이 온 그녀의 근황은 이러했고, 나는 얼마 전에 <차인표의 블랙박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빙의된 사람들에 관한 내용을 심심풀이 땅콩 정도의 호기심으로 본 적이 있다. 심심풀이 땅콩 정도의 호기심이라 함은, 그것이 현실성이 없어서 시시하다거나 혹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라 놀라운 일이어서가 아니다. 모처에 귀신이 출몰한다거나, 미확인 비행물체가 목격되거나 눈빛으로 숟가락을 구부러뜨리는 일쯤이야 사건도 아니다. 그런 사건을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익히 들어서 알고 있고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논란의 여지는 이제 진부하기만 하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당신은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믿느냐’라는 질문보다는 ‘외계생명체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느냐’라는 질문이 조금 더 현실적인 질문이리라.

과학이라는 절대적 진리는 고작 물리적 현상을 숫자로 표기하거나 화학적 현상을 임의의 기호로 표기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바람은 왜 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과학적 설명이란 뜨거운 공기와 차가운 공기, 고기압과 저기압 사이의 물리적 이동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왜 부는가’에 대한 답변이 아니고 ‘어떻게 부는가’에 대한 답변일 뿐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이란 ‘왜’에 대한 해답은 없고 단지 ‘어떻게’에 대한 설명만 임의의 수치와 기호, 수식과 공식으로 설명할 뿐이다. 인간은 왜 태어나는가. 생명체란 과연 무엇일까.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시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신은 이 세상을 왜 창조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그리고 현생 인류의 의식수준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해답들. 이런 질문들은 한번 시작되면 끝이 없다. 그래서

이런 유의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가슴은 답답증에 폭발할 것만 같고 머릿속은 ‘잘못된 연산을 수행’한 컴퓨터처럼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만다.

그 끝이 어디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 속 작은 별 하나 위에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태어나 목적도 이유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설픈 지적 생명체. 공포의 근원은 무지이다.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것. 그것이 공포의 근원이다. 그래서 어두움, 낯선 사람, 모르는 길은 공포이다. 본 적이 없는 생명체, 원리를 알 수 없는 자연현상들은 우리에게 공포를 안겨준다. 그 공포를 피하고자 인간들은 과학적 규칙과 종교적 원론들을 만든다. 그리하여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논의의 가치조차 없는 미신이거나 과대망상에 의한 착각으로 규정하고, 종교적으로는 절대존재가 언급하고 일러준 진리라는 것에서 벗어난 여타의 의문과 재론의 여지들은 차라리 죄악으로 간주하여 근본적으로 무지로의 접근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스컬리와 멀더가 담당했던 수많은 미결 사건들은 열람금지 x파일이 된다. 한때 내가 즐겨보던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라는 프로그램도 종교단체의 반발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모두 가치관의 혼란을 막기 위함이리라. 하지만 무지라는 것은 눈가리고 귀막음으로 보호할수록 더욱 커지는 것이다. 한편 우주의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열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요지경인들 그리 무서울 것도 없다. 기밀문서 X파일이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 방영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그 초자연적 사건들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많은 것을 ‘알게’ 하였으니까.김형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www.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