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 정문을 뒤로 하고 서서 오른쪽으로 100여 미터 가면 골목에 쌈지스페이스라는 공간이 있다. 유망한 젊은 아티스트들을 초청하여 전시회, 음악회, 각종 이벤트 등의 멍석을 깔아주는 곳이다. 1월 한달 동안 열리고 있는 전시는 ‘미나와 44전’이다. 미나도 작가 이름이고 44도 작가 이름이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작가로 선정된 박이소도 오랫동안 박모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바 있고 성이 천씨인 여성작가는 1000이란 이름으로 활동한다. 그들에게 본명을 물어서 쓰는 것은 실례라 한다. 서태지를 괄호 열고 가명! 이라고 쓰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미나의 ‘오렌지 페인팅’은 가로로 길게 온갖 종류의 오렌지색을 칠한 캔버스가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고 그 밑에 꼭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정갈하게 그려놓은 소파, 이 두개가 합쳐져서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미나에게 유명한 화랑의 큐레이터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나씨 오랜지색 페인팅 있어요/ 네 있는데요. / 그런데 그 그림이 가로예요 세로예요/ 세론데요./ 그거 돌려가지고 가로로 못 걸어요/ 가로로 걸 수는 있겠지만 그럼 이미지가 옆으로 누워버릴 텐데…./ 아이 그럼 안 되겠네. 가로면 좋겠는데…./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작가는 전화를 끊고 화가 치민다. 어떤 호사가집의 소파 뒤쪽에 구색을 맞추어 걸어놓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구입하려 한 큐레이터한테 울화통이 터졌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 하나를 팔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분풀이도 있었을 것이다. 좋다. 내가 가로의 오렌지 페인팅을 그려주지. 그래서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오렌지색, 국산이건 수입산이건 다 긁어모아 32가지의 오렌지색 페인트를 산다. 와! 그렇게 다양한 오렌지색이 있다니…. 돈이 무척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 오렌지 페인팅에 어울리는 소파를 그려넣으므로써 ‘오렌지 페인팅’이 탄생했다(미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얼마 전 어느 외교관의 집 거실에서 국내 유명작가의 세로 그림이 가로로 걸린 것을 목격했다. 원래 세로였지만 벽에 걸기가 나빠서 가로로 걸었고 이미지상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소장가는 말했고 나도 덩달아 수긍했던 적이 있다).
44는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아카데미 과학교재의 로봇 등 조립식 장난감과 그것과 꼭 같은 일본제의 조립식 장난감을 나란히 펼쳐놓았다. 국내 회사들이 복제, 판매했던 이러한 프라모델들과 만화책, 표절시비가 붙었던 뮤직비디오, 대중음악도 함께 제시되었다. 작가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오리지널이 재현과 재생산을 통해 재창조됨으로써 새로운 오리지널로 탄생하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동서고금의 예술작품들은 물론 만화, 영화, 음악 등의 대중문화에서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언어와 철학도 서로 이미지를 차용하고 베끼고 복제하고 리메이크하고 또 대량생산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가 동시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공감하는가 하면 사이버상의 세상과 실제의 현실은 모호해졌다. 인간은 복제되기에 이르렀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과연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러한 시대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기존의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들의 작업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탄생한 작품들을 편안하게 감상하며 공감하고 기쁨을 느끼는 것은 구경꾼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전시장을 나오는 기분은 그러나 우울했다. ‘나이 50이 넘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고 했는데…. 이들의 작품을 살 만큼 지갑이 넉넉지 못한 것이 갑갑해서였을 것이다. 김선주/ <한겨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