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이란 수사가 때론 지극히 당연한 태도와 행위를 일컫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언제나 원칙론자들의 몫만은 아니다. 원칙을 지키면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이 팽배해 있는 이 세상 ‘게임의 규칙’이란 게, 조지 버나드 쇼가 “별볼일 없는 인간들이 치밀한 관찰력과 사려깊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부르는 데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신랄하게 정의했던 것과 같은, 냉소주의자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 말이다.
21세기의 대중음악계에서 뮤직비디오를 제작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당연한 절차로 간주된다. MTV의 등장 이래로 그건 더이상 파격적인 것이 아닌 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여기 펄 잼(Pearl Jam)이란 거물 밴드에 관한 것이라면 얘기는 좀 달라져야 한다. 싱글 ‘Love Boat Captain’의 비디오클립이 제작 사실 그 자체만으로 ‘파격적인’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그들의 원칙은 음악에 대한 좀더 근원적인 에토스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펄 잼은 너바나(Nirvana)를 선봉으로 한 (소위) ‘시애틀 그런지(Grunge) 4인방’의 맹주로서 얼터너티브 록 융기의 폭발적 마그마를 제공했던 당사자인 동시에, 그 결과로 90년대 초반 음악계의 전면적인 지각변동 에너지로 작용했던 얼터너티브 록 열풍에 의해 배태된 기린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데뷔 앨범을 1천만장 이상 팔아치운 ‘록 스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펄 잼은 당대 대중음악계의 ‘파격적 원칙론자’였다. 그같은 판단의 배경은 대안(얼터너티브)이 대세(메인스트림)로 부상하는 아이러니의 중심에 있었다는 태생적 배경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 그들의 태도를 규정시키고 있다는 해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규정하는 기성의 자본 중심적 규칙들에 대한 일탈로 로큰롤 본래의 태도를 명확히 했다. 클린턴을 앞세운 히피 민주당 행정부의 집권 아래 이데올로기의 붕괴와 급격한 경제 활황세를 목격한 기성세대들이 90년대에 낙관적 전망을 보낸 것과는 달리, 젊은이들의 무기력증과 패배적 정서가 오히려 팽배해가고 있던 당시 분위기는 그들을 지원하는 원군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이 펄 잼을 ‘스타’로 만들어준 것이다.
펄 잼이 행동한 파격의 구체적 사례들은 그 이후의 일들이다.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겠다”는, 뮤지션으로서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선언 이후 그들은 뮤직비디오 제작은커녕 필요 이상의 홍보용 사진을 찍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노선을 견지하기 시작했다. 또한 필요 이상으로 비싼 공연 티켓 가격이 대행업체의 폭리 때문이라며 미국 내 공연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골리앗 ‘티켓마스터’와의 전쟁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미 20년 전 마이너 스레트(Minor Threat)의 이언 매케이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던 사안이 그들을 통해 본격적인 쟁점으로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해적판 앨범들에 대한 적극적 자력구제의 대응책으로 제시한 앨범 발매 계획은 가장 최근의 ‘사건’이다. 각기 다른 공연 실황을 담은 2장짜리 라이브 앨범을 2년 사이에 무려 72장이나 발표하겠다고 공언하고, 끝내 그 약속을 지킨 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요컨대, 그 같은 사례들은 (적어도 여기서는) ‘Love Boat Captain’의 비디오를 펄 잼의 파격적 태도 변화로 간주하는 근거들이 된다.
데뷔 앨범 수록곡 이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비디오클립을 제작한 그들의 입장 변화 이유는 아직 불분명하다. 하나 정작 중요한 것은, 원칙적이기에 오히려 파격적으로 비칠 만큼 확고했던 펄 잼의 태도 변화가 뮤직비디오 제작의 당위성에 지배되는 현 음악산업계의 뮤지션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업윤리의 요청과 뮤지션으로서의 책임감 수행에 동반하는 조건 즉, ‘뮤지션의 본령은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일에 있다’는 사실이 언제부턴가 저 먼 옛날얘기가 돼버린 음반산업계에 대한 원칙론자들의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mymusic.co.kr 대표 bestle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