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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감정에 봉사한다
2001-04-26

촬영감독이 말하는 <푸른 안개> <비단향꽃무>

<푸른 안개> KBS2 토·일요일 저녁 7시50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느니라, 고 했나. 그건 시인이 우체국 창가에서 편지를 썼기에 가능한 말 같다. 모두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불륜, 불임의 시대에 사랑은 어떻게 행복과 인과관계를 가지는가. 사랑하는 것은 행복한가. 사랑받는 것은 행복한가. 그들은 외롭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멜로드라마는 ‘감상적(感傷的)인 애정극’이다. 마음을 다치고 그 생채기가 아프다. 이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20살의 한 여자의 사랑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나왔을 법한 것이고, 40대의 한 남자에게 사랑은, 잊었던 감정의 다그침이다(<푸른 안개>). 한 남자는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서 다가서지 못하고, 심지 곧은 여자는 향기 짙게 다가오는 사랑을 의심한다(<비단향꽃무>). 이들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벽이다. 그들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랑하므로 일반적인 ‘행복’을 불신하고, 둘이 있기 위해서 ‘외로움’을 향해서 다가가거나,

사랑하기 때문에 외롭다.

하는 말은 전달하려는 감정과 왜 이리 어긋나는가, 말로 할 수 없는 서로간의 감정은 왜 이리 복잡한가. 한컷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 들어가는

말없는 인서트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필수적이다. 버스를 타고 간다, 정류장에서 기다린다, 술을 마신다, 밤중에 일어나 담배를 피운다, 남편의

불륜을 알아차렸다. 소설에서 많은 말들이 나왔을 법한 이 부분은 드라마에서는 단지 지문으로만 처리된다. 그리고 그 ‘지문’은 멜로드라마의

‘중심’이다. 그들의 외로움과의 공존은 화면으로 더 잘 전달된다. 멜로드라마의 화면이 깊어지고 서로간에 갇히고 벽 사이에 갇히는 이유는

그들의 감정이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촬영시간 18시간에서 20시간, 그런 일이 5일 또는 6일 동안 계속된다. 하루에 18분가량을 찍으면 한주의 분량이 완성되는데,

그들이 1시간에 뽑아내는 그림은 1분가량이다. 영화의 콘티에 해당하는 것이 없는, 거의 본능에 의존하며 찍어내는 드라마들, 우리는 근래에

보기드문 멜로드라마의 수작 두편을 만났다. 말보다도 전달하는 게 많은 화면, <푸른 안개> <비단향꽃무>의 촬영감독으로부터

듣는다.

강장수 촬영감독, <푸른 안개>를 말하다

강장수(59년생) 촬영감독은 표민수 PD와 <거짓말> <슬픈 유혹> <바보 같은 사랑>을

같이했다. KBS 미니시리즈 <귀여운 여인>을 마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표민수 PD의 <푸른 안개>(연출 표민수 극본

이금림) 작업에 참여했다. 5∼6개월째 피곤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집중력도 떨어졌을 텐데, 표민수 PD가 끌고 와서 맡긴 사람이란 믿음

때문에 우리도 <푸른 안개>를 기대를 갖고 보게 되었다. 그의 화면은 <거짓말>로 이미 정평이 났다. 성우(배종옥)와

준희(이성재)가 키스하는 장면, 원형 달리 10번을 돌려 그들이 키스하는 순간 떨어지는 눈물을 잡아냈다. 절정에 달한 것은 <슬픈

유혹>. 2부작이다보니 시간도 보통보다 많이 들였다. 파란색 톤에서 그들의 고독이 깊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어두움이 많이 깔리는

화면은 TV 사상 처음이었을 것이다.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인물들, 그 느낌은 <푸른 안개>로도 그대로 넘어왔다.

강장수 촬영감독의 별명은 “강풀숏”(fullshot)이다. 촬영장에서 만난 이가 덧붙인 말에 의하면 “풀숏을 많이 잡아서가 아니라 매번

다른 풀숏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한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바라봄’이 있을 수 있는지 <푸른 안개>를 보면 알 수

있다. 갤러리 촬영현장, 그 좁은 장소에서 그는 레일을 깐다. 한쪽 벽에 갇힌 아내로부터 둥근 레일을 타고 카메라가 물러나면, 또 다른

벽이 화면을 채우고 들어 온다. 결과적으로 두 개의 벽이 아내를 가두고, 고립감은 더 심해진다.

감독은 맨 처음 촬영장에 들어가면 표민수 PD와 함께하는 일이 “구멍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감정의 벽에 싸인 이들은 유난히 구멍에

많이 갇힌다. 집 안에 있는 격자 사이로 인물이 나타나기도 하고, 미술관의 조각품 사이로 그들이 보이기도 한다. 갤러리에서는 심지어 탁자

밑에 카메라를 집어넣음으로써 탁자의 바닥이 인물의 머리 위에 오도록 한 일도 있다. 머리에 인 이물질은 당연하게도 그에게 가해지는 압력의

표현이다.

강장수 촬영감독은 화면을 “피사체와 여백의 조화”라고 말한다. 여백을 빛으로 채우기도 하고, 감정의 부침에 따라 여백을 좁게, 깊게 설정하기도

한다. 민규(김태우)가 성재(이경영)를 기다리는 장면, 화면의 2/3를 벽이 차지하도록 한 화면은 실험으로 기록될 것이다. “TV 화면은

작고 평면적이다. 블랙을 많이 걸어주게 되면 입체감이 가해진다. 그리고 인물이 작더라도 대비되는 색깔로 찍을 경우에 그것이 돋보인다. 과감하게

블랙을 깔아줌으로써 너저분한 것들을 끊어내고 연기자가 보이게끔 한다”고 강 감독은 이야기한다. 모두 다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드라마의 촬영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처음이고 마지막이라고 덧붙이면서.

<푸른 안개>에는 시점숏이 거의 없다. 시청자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하게끔 하기보다는 그들을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한다.

그래서 감정의 파고가 거센 화면에서조차도 시청자들은 평정심을 유지한다. 그 여운은 나중에 온다. 신우(이요원)와 성재(이경영)의 키스장면도

그렇다. 아주 멀리서 뛰어오고 있다. 숨이 찰 정도로 뛰고, 또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한 화면에 잡히면서 그들이 다가선다.

그리고 서로간의 바라봄. 이요원의 클로즈업이나 이경영의 클로즈업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입을 맞춘다. “사물을 바라본다, 라고 할 때 그

사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걸고 들어간다. 넘겨서 찍는다.” 그리고 필터도 쓰지 않는다. 현장에 들어가서 거기 있는 그대로 사용한다.

사물이 원래 있던 그 상태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권혁균 촬영감독, <비단향꽃무>를 말하다

<비단향꽃무>(연출 박찬홍 극본 김지수)는 권혁균(69년생) 촬영감독이 처음 맡은 미니시리즈다. 드라마국에서 그는 2회로 끝난

인디드라마 ‘동시상영’과 <꽃상여> <그대의 찬 손> 등 5편의 단막극을 찍었다. 강장수 촬영감독은 맨처음부터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비단향꽃무>에서 벌써 그런 게 보인다며 칭찬을 건넨다. 특히 학창 시절 장면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청춘’이다. 일부러 아름답게 찍으려 하기도 했다. 디퓨전 필터를 쓴 일명 ‘뽀사시’화면 위주로. 20대 중반의 주인공들이 교복을

입은 것이 현실감 있게 부각되길 바라는 피치못할 사정은 이후 급작스럽게 진행될 영주(박진희)의 신고와 대비되는 전략으로도 읽힌다.

<비단향꽃무>는 8회까지 모두 야외촬영이었다. 사무실과 방이 세트로 만들어지면서 일이 좀 덜어졌지만 여전히 야외는 80∼90%다.

세트를 피하는 이유는 나오는 화면 각도가 뻔하기 때문이다. 세트는 사람이 생활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카메라가 잡을 수 있는 각도가 제한된다. 하지만 세트인 승조(류진)의 사무실에서 우리는 세트 사이를 넘어가는 카메라를 볼 수 있다. 세트촬영현장에서

한 선배가 “너는 왜 정석을 따르지 않느냐. 황당한 앵글을 많이 찍냐”는 충고 섞인 추궁을 들었다. “영화에서는 이미 예전에 깨졌지만 드라마에서는

여전히 헤드 스페이스, 바스트-타이트-클로즈업으로 가는 순서 등 ‘수칙’을 불문율로 여기고 있”는 사실이 불만인 그에게 촬영의 수칙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비단향꽃무> KBS2 월·화요일 밤 9시50분

그것은 조명의 사용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로등 아래 승조와 우혁(최민용) 둘이 서 있다. 가로등은 집중 조명이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한명이

가로등 불빛을 바로 받는다면 한명은 뒤로 받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보통의 드라마에서는 둘에게 공평하게 빛이 비치게 찍는다. 권혁균 촬영감독은

그런 수칙쯤은 어겨 버린다. 영주를 향한 사랑이 당당한 승조는 빛을 바로 받고 있지만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우혁은 그 빛을 등지고 선다.

조명감독의 그런 마인드 역시 그가 좋아하는 바다. 인물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면야. 그는 영주와 우혁이 체육관을 청소하는 장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영주가 잠이 들자 우혁이 햇살을 손으로 가리는 장면과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을 좋아한다. 체육관 청소장면, 서로에게 기댄 실루엣 뒤로 햇살이 비쳐든다. 어둡지만 가로로 앉은 그들 실루엣과 가로로 길게 비치는

햇빛이 맞춰져 안정된 구도를 이룬다. 우혁이 햇살을 손으로 가리는 장면이 꼽히는 것은 감정의 진폭이 큰 탓일 것이다. 항상 바라보기만 하는

우혁이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한 사람을 지켜주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야경을 배경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은 여러 번 나온다. 매번

각도는 다르지만, 창 밖의 야경과 가로등이 작은 인물과 대비되어 외로움이 증폭된다. 그 장면을 보고는 다른 사람들이 “너 많이 외롭구나”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권 감독은 “사실은 선이 굵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아름다운 화면은 개인적으로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을 한다. 좋아하는 스타일을

찍으면 어떻게 될까, 그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 구둘래 | 객원기자

사진제공 KBS 홍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