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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만은 내 거다,<라쿠카키 왕국>
2003-01-23

컴퓨터게임

팬클럽이란 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모두 라이벌이다. 감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뭐가 좋다고 팬클럽을 결성해 웃고 떠드는지 모르겠다. 어쩌자고 경쟁자를 늘리고 또 늘리는지 이상하다. 다른 모든 사람들한테도 똑같은 웃음을 흘리는 존재는 싫다. 오직 나만 쳐다보고 나한테만 웃어주고 다른 사람들하고는 말도 안 했으면 좋겠다.

<라쿠카키 왕국>은 재패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지브리 스튜디오’가 참여해서 유명해진 게임이다. 전체적 게임 이미지와 캐릭터들을 지브리에서 만들었다. 또 하나 화제가 된 건 게임에 도입된 독특한 기술이다. 임의로 그린 2D 캐릭터를 3D 오브젝트로 전환할 수 있는 이 기술은 도쿄대에서 이론화하여 개발된 것이라고 한다. 얼핏 듣기만 해도 굉장해 보인다. 여기에 도쿄대의 후광이 둘러져 있고, 그 유명한 지브리 스튜디오까지 참여한다니 이름값은 차고 넘친다. 관심이 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라쿠카키’는 ‘낙서’라는 뜻이다. 지브리풍의 이국적인 풍광을 가진 라쿠카키 왕국에서는 신기하게도 낙서들이 살아 움직인다. 태초에 색깔이 존재했고, 신은 이 색깔들로부터 바람과 태양과 물과 풀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과 낙서들이 태어났다. 인간과 낙서는 조화롭게 공존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욕심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더 큰 힘을 갈구하며 낙서들을 잡아 가둬 색깔을 빼앗기 시작했다. 신은 격노했고, 인간은 낙서를 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이제 낙서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천사 ‘펜젤’(펜+엔젤)의 도움 없이는 낙서를 할 수 없다.

펜젤이 아무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혼신의 힘을 다해 도와줘도 처음부터 거창한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사용할 수 있는 색깔도, 붓의 종류도 서너 가지에 불과하다. 마음 같아서야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멋지고 대단한 걸 그려내고 싶었지만 첫 작품으로 탄생한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찌그러진 빨간 공이다. 보잘것없는 결과에 실망하기도 전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활기차게 뛰어다니며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즐거워한다. 덩달아 즐거워진다. 마음대로 튀어다니는 녀석을 달래 격투장으로 가자. 자기가 만든 낙서를 데리고 나온 다른 사람들과 한판 승부다. 이기면 이길수록 사용할 수 있는 색깔이 늘어나고 물감 양 제한도 올라간다. 이제 팔이나 다리, 날개처럼 세밀한 그림도 그릴 수 있다.

태초에 색깔이 존재했고 이 색깔들로부터 모든 것이 태어난다. 나는 신이다. 나의 손가락 끝에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가슴 벅찬 경이로움이 물러가면 비뚤어진 자부심과 만족감으로 목이 메어온다. 이건 나만의 게임이다. 내가 그린 그림들이 세계를 완성한다. 이 게임을 산 사람들은 나말고도 얼마든지 있겠지만, 이 세계는 내가 온전히 만들어낸 나만의 왕국이다.

그림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귀엽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주저앉은 퍼런 연두부도, 뻘건 털이 숭숭 난 일그러진 송충이도 예뻐 죽는다. 3D로 바뀌어 이리저리 퉁퉁거리며 다니는 게 신기한 나머지 못생긴 게 못생겨 보이지 않는다. 보다보면 그게 또 귀엽다. 다른 낙서들과 싸워가며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모습은 더욱 사랑스럽다. 이 녀석들은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 어떤 유명한 캐릭터 디자이너가 매끈하게 뽑아낸 그림도 이보다 더 황홀할 수는 없다. 너무 달콤해서 가끔은 두렵지만 그래도 참고 견딘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