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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들이 씹게 놔둬!
2003-01-22

조선희의 이창

<해리 포터> 상영관에서 <영웅> 예고편을 보던 딸아이가 내게 귓속말로 “난 저런 영화보다는 <엽기적인 그녀>나 <집으로…>처럼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좋아”라고 말했다. 아니, 이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꼭 꽁치만한 것이 지금 자기 취향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엄마는 다 좋아.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또 저래서 좋고.” 실로,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는 타협적인 발언이었다.

한달쯤 뒤 시사회에서 <영웅>을 보았다. 가히 ‘이미지와 색채의 향연’이라 할 만했다. 영화 틈틈이 대형 스크린 크기의 빼어난 동양화 수십점을 감상했고, 탐미주의자로서 장이모의 재능과 야심이 자본이라는 연료를 무제한 공급받을 때 어디까지 날 수 있는지를 보았다.

이 문제작은 내게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리얼리즘 정신과 탐미주의 태도가 긴장감 넘치는 파트너십을 유지했던 <붉은 수수밭> <홍등> 시절의 그에 대해 향수를 갖고 있는 나로서는 10년 만에 귀환한 장이모의 탐미주의가 반갑기는 했으되, 그것은 마치 탐미주의라는 말이 리얼리즘이라는 주인을 분실하고 빈 안장만으로 돌아온 꼴이었다. 이건 장이모가 만든 ‘퓨전 스타일의 홍콩영화’인데, 거기서 <붉은 수수밭>의 그 원시적인 역동성을 다시 발견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을 지지하고 싶었다. <책상서랍 속의 동화> 같은 검소하고 평이한 소품들을 만드는 동안 그는 아마도 화려하고 웅장한 스펙터클에 대한 허기를 느꼈을지 모른다. 그리고 모든 야심만만한 작가들처럼 그도 늘 다음 작품은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어떤 것에 도전해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특히 장이모 편에 서고 싶을 때가 언제냐 하면, 그가 이른바 6세대 감독들에게 무자비하게 비판받을 때다. 지금까지도 ‘장이모 때리기’를 취미 삼아왔던 6세대들에게 <영웅>은 안성맞춤의 타깃이다. 우리 돈으로 300억원 정도를 들였다 하고, 당국이 팔 걷어붙이고 홍보해주었으며, 중국에서 대단히 흥행했다. 인민대회당의 시사회에 다녀온 기자에 따르면, 이 시사회는 중국 사회 파워엘리트 그룹과 그 자녀들이 운집해서 아주 볼 만했다 한다. 제5세대가 정부 및 상업주의와 타협한다는 비난에, <영웅>은 아주 명쾌한 입증자료다.

1998년인가, 인터뷰에서 장이모는 6세대 가운데 기대되는 감독이 누구냐는 질문에 장원(姜文)을 꼽았다. 그의 작품엔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면서 <햇빛 쏟아지던 날들>을 극찬했었다. 하지만 그뒤 장원이 장이모를 중국 정부의 ‘공식 감독’이라는 식으로 비아냥댔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공연히 내가 허탈했다. 6세대 감독들은 5세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거침없이 비난과 야유를 퍼부어대고, 장이모 감독은 6세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대체로 언급을 피한다. 비판은 청년의 미덕이고, 관용은 장년의 미덕인가 보다.

문화혁명 때 공장으로 농장으로 하방돼서 고난을 치른 뒤 1978년에 다시 문을 연 베이징영화학교에 입학했던 늦깎이 영화학도들, 그 제5세대에서 지금의 중국영화는 시작됐다. 장원이나 지아장커 같은 6세대 대표주자들은 첸카이거와 장이모의 영화를 보고 배웠다. ‘희망이자 벽’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선배를 갖는 것이 얼마만한 행운인지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6세대는 완고한 가부장 같은 중국 정부에 맞서면서 ‘독립영화’를 찍느라 허구한날 상영금지나 제작금지를 당하지만, 그건 이미 장이모도 과거에 무수히 겪은 일이다. 아무려면, 천안문세대의 고난이 문화혁명세대의 역경만 할까.

하지만 장원의 작품에서 장이모의 영향을 발견할 때, 나는 ‘비판하면서 배운다’는 경구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가령 장원의 <귀신이 온다>에서 나는 장이모식 민중주의를 발견하며 <붉은 수수밭>의 고전적 풍자정신이 모던한 희비극 형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본다. 장이모나 첸카이거가 지금 어디에 있든, 그들은 이미 1980∼90년대에 당대의 임무를 완수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의 ‘영화의 아버지’를 비난하는 6세대들 인터뷰를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튀어나온다. “평론가들이 씹게 놔둬. 니들은 니들 작품에 최선을 다 하란 말이야.”

하지만 어쩔 것인가.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에게 등을 보이며 걷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손가락질 받는 것도 앞사람의 몫이다. 또한, 업적을 남기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엔 밟혀주는 것까지가 앞서가는 사람의 몫이다.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