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준 | 문화에세이스트 http://homey.wo.to
지난주는 공교롭게도 일본과 관련된 일이 많았다. ‘역사 교과서 왜곡’ 같은 국가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는 서울에서 열린 학술 워크숍에 참석하여 발제 하나를 맡은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산업 시찰’(?)이라는 명분으로 도쿄(東京) 인근에 있는 음반 물류센터를 방문한 일이었다. 두개의 경험은 ‘일본’과 ‘한-일 관계’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게 하였다. 물론 이제 겨우 두 번째로 일본을 찾아간 ‘촌놈’의 소감 정도다. 학술 워크숍은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와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가 공동주최한 행사였고, “동아시아의 월경적(越境的)인 역사와 공간”(Transbordering history and space in East Asia)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국제학술대회치고는 조촐한 편이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참석자들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발표된 내용을 여기서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듯하다. 내가 받은 한 가지 인상이 있었다면 일본인 연구자들은 작은 주제를 꼼꼼하게 천착하는 반면, 한국인 연구자들은 거대한 담론을 원론적으로(때로는 선언적으로) 주장한다는 점이었다. 나의 경우도 “동아시아 3국의 록 음악의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만 거창한’ 발표를 했고, 아무래도 알맹이가 없는 것 같아 1년 반 전쯤 ‘동네 잔치’ 벌였던 일을 ‘한국의 인디 음악과 한국계 미국인 인디 음악과의 연대 어쩌구’ 하면서 뻥튀기를 했다. 그 결과 발표가 끝난 뒤, “그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고 꼬치꼬치 캐묻는 일본인 연구자의 질문에 “별 거 아니었다”고 ‘오리발’을 내미느라 고생해야 했다(물론 <씨네21>에 소개되기도 한 에이든(Aden)의 음반 발매에서 보듯 저 ‘연대’가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건 아니다). 일본의 거대 음반 물류회사를 찾아갔을 때도 예의 그 꼼꼼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이곳을 찾아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전후 사정이 복잡하므로 생략한다). 일본 음반센터 네트워크(NRC network)는 2만평의 부지와 수백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곳이었는데, 방대한 규모보다는 치밀한 시스템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 시스템은 대형 음반사뿐만 아니라 인디 레이블들까지도 망라하는 공동 물류를 조직하고, 조그만 소매점에서 한두장의 음반을 주문해도 다음날까지 배송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주문량이 많지 않은 아이템들을 배급하기 위해 별도로 개발했다는 자동 분류기(sorter)였다. 담배 자판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이 시스템의 발명가는 70줄에 접어든 작은 체구의 노인이었는데, 맙소사 그가 ‘회장님’이었다.일본의 업계 시스템으로부터 무얼 배워올지는 아무래도 나의 소관사항은 아니었고, 아무래도 감성구조가 다른 한국의 ‘사장님’들과 함께 지내는 일이 생각처럼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녁 시간에는 전철을 타고, 하라주쿠(原宿)와 시부야(涉谷)와 신주쿠(新宿)의 밤거리를 싸돌아다녔다. 워낙 말로 많이 듣고 영상으로도 자주 본 장소에 나의 ‘실물’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했고, 한국 같았으면 어깨가 스무번은 부딪혔을 인파를 유유히 헤치고 지나갈 수 있었다는 점도 신기했다. 하지만 신기한 것도 잠시였고 이내 “조금 젊었을 때 오는 건데”, “평소에 일본어라도 배워둘 걸” 하는 아쉬움이 엄습했다. 아마도 ‘나와 취향과 정서가 통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연히 그들과 해후할 수도 있을 텐데…’라는 잠재의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인터넷도 뒤져볼 겨를없이 황망하게 찾아간 사람에게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날 리 없었고, 그걸 자각하는 순간 신주쿠의 거리에서 “간꼬꾸진 데스까?”라는 말과 함께 “오천원, 이만원” 등의 한국어를 들을 수 있었다. ‘에스테’(한국형 마사지 -_-)에서 놀다 가라는 일본인 ‘삐끼’였다. 나와 동행했던 한국인들 대부분은 밤마다 ‘한국에서도 거의 매일 할 수 있는’ 술자리를 벌였다.P.S. 워크숍을 준비한 도쿄대의 강상중 교수는 서론에 해당되는 발제문에서 “서울에서의 자극적 ‘해후’를 기대한다”고 썼다. 그에 대한 나의 준비가 소홀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또한 워크숍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들이 내가 도쿄에 있을 동안 서울에 남아 있어서 “도쿄에서의 자극적 해후”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쉬울 따름이다. 결국 이번 여행의 결론은 경계를 가로지르는 경험이란 것도 존재하는 차이들을 세밀하게 확인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의식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