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박스’를 사온 건 영하 7도까지 기온이 내려간 날이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한 발짝 한 발짝 힘을 주면서 얼음이 두껍게 언 길을 걸어 집까지 오는 길은 정말 춥고 힘들었다. 만일 ‘플레이스테이션2’나 ‘게임큐브’를 사오는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고생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엑스박스’는 웬만한 구형 비디오 플레이어보다 크기도 크고 무게도 무겁다. 색은 쿨한 검은색이 아니라 흉측한 시커먼색이다. 패드도 본체를 쏙 빼서 10분만 하면 손아귀가 아플 정도로 크고 두껍다. 깜찍한 ‘게임큐브’와 나란히 놓고 보면 병아리색 옷을 입은 초등학생과 떡대 아저씨 같다. 미모는 떨어져도 성능은 뛰어난 게임기 ‘엑스박스’가 2002년 말 한국에 정식 출시되었다. 일본 출시 반년 만이니 다른 콘솔 게임기와 비교하면 꽤 발빠른 국내 진출이다.
‘엑스박스’는 단순한 게임기를 넘어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인 홈 네트워크의 첨병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실망스럽다. ‘엑스박스’의 판매량은 전세계적으로 ‘플레이스테이션2’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 그치고 있고, 일본에서는 판매부진 단계를 넘어 포기 상태에 이르고 있다. 닌텐도의 ‘게임큐브’와는 도토리 키재기로 호각지세지만 일본에서 1만9800엔으로 덤핑 판매되고 있어 기계가 팔릴 때마다 수익을 내는 게 아니라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한다. 반마이크로소프트 게이머 진영에서는 ‘엑스박스’를 여러 대씩 사서 마이크로소프트를 망하게 하자는 독창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성능만으로 따지자면 ‘엑스박스’는 현존 최강의 게임기다(플레이스테이션2보다 2년이나 늦게 나왔으니 당연하다). 집에 와이드 화면 프로젝션TV라도 있다면 ‘엑스박스’의 파워가 더욱 빛을 발한다. 게임기와 별매인 HD AV팩을 구입해 연결해서 게임기와 함께 발매된 <데드 오어 얼라이브3>를 플레이해보기라도 하면 지금까지의 게임 그래픽 수준을 한 단계 뛰어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옥에 티라면 ‘플레이스테이션2’와 달리 DVD 플레이어 기능이 없다는 것인데, (이번에도 또) 별매인 DVD 키트를 구하면 가능하다.
별매에 또 별매, 구색을 갖춰 모든 세트를 구입하려면 돈이 꽤 든다. 엑스박스의 정식 판매가격은 27만9천원이지만 조금만 다리품을 팔면 26만원 정도에 살 수 있다. 여기에 HD AV팩이 2만5천원, DVD 키트가 4만원이니 전부해서 32만5천원이면 DVD 플레이어 겸 게임기 엑스박스 세트를 갖출 수 있다. 만일 집에 있는 홈시어터로 5.1채널로 게임을 즐기고 싶다면 (한번 더) 별매인 옵티컬 단자를 사야 한다.
199.99달러인 미국이나 1만9800엔인 일본에 비해 꽤 비싼 가격이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 ‘엑스박스’로는 할 만한 게임이 많지 않다. 일본의 경우 연말 소프트웨어 판매량 정산에서 50위 안에 든 건, 24등을 한 세가의 <팬저 드래군 오르타> 딱 한편뿐이다. 일본보다는 사정이 좋은 미국을 살펴봐도 톱10에는 <톰 클랜시의 스플린터 셀> 한편이 들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국내 상황도 비슷할 거라곤 말할 수 없다. 일본과 미국 게이머의 취향은 확연히 구별된다. <포켓몬>이나 <파이널 판타지> 같은 희귀한 경우를 제쳐놓으면 일본에서 메가히트한 게임이 미국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게 보통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본과 미국 게임 모두를 소비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장기인 기업 매입 전략은 여전할 테고, 국내 게이머 취향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많이 내놓아주기만 한다면 승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