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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세계로 떠난 광고 세편
2003-01-15

말랑말랑한 화법

MBC TV <전파견문록>은 딱딱한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말랑말랑한 ‘순수’표 전략으로 특화에 성공한 예능프로그램이다.어른과 차별화된 맑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엿본다는 캐치프레이즈로 개운한 재미를 안기는 데 성공하며 오랫동안 시청자의 꾸준한 호응을 얻고 있다.

새해 들어 광고계에도 <전파견문록>처럼 순수 찾기에 나선 CF가 두드러지고 있다.굳이 미인, 아이, 동물 등을 포괄하는 ‘3B 법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광고가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유용한 장치로 동심을 선호한다는 것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그럼에도 묵은 때를 벗겨내고 가슴에 신선한 공기를 채우는 새해 즈음이어선가.순수의 세계로 떠난 CF들이 유난히 입가에 ‘빙그레’ 자국을 새기고 있다.

SK텔레콤의 기업이미지 광고가 대표적인 사례다.지난해 성탄절을 앞두고 선보인 ‘로봇’편과 새해 초부터 방송을 타고 있는 ‘일출’편은 ‘민이’(본명 강윤도)라는 4살의 남자아이를 주인공으로 어느 가족의 단란한 한때를 포착하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무장한 디지털 기업의 CF란 측면에서 흥미롭다.

길거리에 설치된 대형 로봇을 보고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민이의 모습에 엄마가 아빠한테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로 민이를 위한 최상의 성탄절 선물을 귀띔하고(‘로봇’편), 동해로 일출을 보러 갔다가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해가 뜨는 순간을 놓친 민이에게 아빠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동영상을 통해 일출장면을 보여준다(‘일출’편)는 게 광고의 내용.

현실감이 넘치는 에피소드로 공감을 사고, 그 안에 휴대폰의 기능을 매끄럽게 녹여낸 것이 이동통신기업의 시의적절한 이미지 제고용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뭐니뭐니해도 이 광고의 강렬한 호소력은 꼬마 모델에서 찾을 수 있다.‘로봇’편의 <내가 찾는 아이>란 배경음악의 제목대로 꼼꼼한 접근방식 아래 꼬마 모델을 시청자가 찾는 매혹적인 아이로 잘 포장했다.‘까르르’ 하는 아이의 천진한 웃음소리를 생동감 있게 살린 청각적 장치와 온전히 아이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에만 집중한 카메라의 시선은 안이한 베이비 전략과 거리를 두고 있다.

어린이는 꿈나무란 상투적인 비유를 떠올리면 이번 CF를 통해 새롭게 소개한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는 힘’이란 슬로건은 충분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그래도 약간 거창한 감이 없지 않아 광고에 대한 부드러운 감정이입을 방해한다는 아쉬움이 있다.아무리 지난해 월드컵 이후 ‘대한민국’이 이 기업의 버리기 아까운 소중한 자산 같은 말이 됐다지만 말이다.

썬키스트NFC 광고는 민이보다 좀더 프로급에 속하는 심혜원이란 전문 아역 모델을 전면에 내세운 CF다.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법사같이 차려입은 심혜원과 탤런트 정보석이 부녀로 등장해 냉장고에 마법을 건다는 동화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다.부녀가 입을 맞춰 ‘사그락, 사그락’ 하는 의성어를 내는 부분이 광고의 앙증맞은 분위기를 돋운다.

SK텔레콤 CF처럼 이 광고도 동심과 가족애를 한다발로 엮어 따사로운 감성을 전하고, 아이 모델의 순수한 웃음을 클로즈업해 시청자의 뇌리에 결정적 밑줄을 긋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난해 이 CF엔 정보석과 그의 실제 부인 및 아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당시 제작진은 딸 역의 모델이 한명 더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심혜원을 기용했는데 방송 뒤 심혜원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이 도드라져 이번엔 가짜가 진짜를 밀어내는 식의 모델 진용을 짜게 됐다.

순수 찾기는 비단 아이를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지난해 성탄절용으로 방송된 배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케이크 CF는 원빈이란 다 자란 어른모델을 앞세워 순수 효과를 노렸다.동화적 상상력을 발휘한 아기자기한 공간에서 한점 그늘없는 표정으로 혼자만의 성탄파티를 즐기는 원빈의 모습은 예쁜 꼬마의 그것 못지않게 투명한 감흥을 유발했다.

‘착하다’는 표현은 분명 좋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속없다’, 혹은 ‘멍청하다’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길 수 있다.반면 ‘순수하다’는 얘기는 똑 떨어지는 칭송이며, ‘순수하지 않다’는 말은 누구도 듣기 싫어하는 소리다.순수를 향한 열망은 다채로운 감성의 스펙트럼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때문에 소비자의 마음 깊숙이 광고의 잔상을 찔러 넣겠다는 이들 CF의 속셈은 너끈히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듯하다.

분명한 것은 아이나 아이 같은 어른을 통해 엿보는 광고 속 순수의 세계는 어쨌거나 또 하나의 판타지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정교한 손길로 무구한 감성의 보물상자를 그럴듯하게 형상화했을 뿐 거기에는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자세보다는 유지하고 싶고 복원하고 싶은 것에 대한 어른의 시선이 더 강하게 개입돼 있을 터다.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고나니 손에 잡힐 것 같던 광고 속 아이의 웃음이 백일몽처럼 허무한 여운을 주는 것도 같다.조재원/ <스포츠 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