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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는 실험동거가‥‥
2003-01-15

김선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라디오 음악프로에서 이상은이 초대손님인 여성출연자와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기겁을 했다. 미녀가 어쩌고저쩌고 하던 중에 꽃미남 이야기가 나오더니 여성 출연자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는 금성무다, 내 방에는 금성무 사진이 걸려 있다, 그런데 코에서 코피가 한 줄기 주르륵 흐르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너무 좋은 나머지 그 코피를 빨아먹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검열에 익숙한 세대인 나의 잣대론 선을 넘은 것이 아닌가 싶었고 순간 이 일로 진행자인 이상은이 방송에서 잘리면 어쩌나 걱정스러워졌다. 그러나 이상은은 웬 엽기하고 낄낄 웃고 여성 출연자는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은 그렇게 예쁘고 멋있는 남자는 한 사람이 독차지하는 것은 옳치 않다고 본다, 여러 사람이 사용해야 한다라며 히히 웃고 이상은이 동조하고… 뭐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꽤 앞서가는 감각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았던 나로서도 요즘 젊은 세대들에 대해선 솔직히 졌다라고 말할 도리밖에 없어졌다. 감을 전혀 못 따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도 그랬었다. 후배 여기자의 연애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젊은 시절 순결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꽤 괜찮은 남자들을 여럿 떠나보냈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 가는 데 몸도 따라가야 하느니라 하며 내 딴엔 획기적인 충고를 하였더니 꼭 증조할머니 보듯 바라보며 “선배 염려마세요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머리가 띵했었다.

내 20대의 막바지는 여자들 치마길이를 30센티미터 대자로 무릎 위 몇 센티미터인지 재고 기준에 안 맞으면 백주에 건널목 한가운데 세워놓고 벌을 주던 박정희 정권의 유신 시절이었다. 한번은 명동에 나갔다가 여자친구 네명이 객기와 오기, 모험심과 실험정신이 발동하여 일제히 담배를 피워물고 복잡한 길거리를 일렬횡대로 행진하듯 걸어갔다. 한 10미터쯤 걸어갔을가, 시민정신이 투철한 누군가가 신고했던지 경찰관이 쫓아와 파출소로 몰고 갔다. 구경꾼들은 뒤를 따르고.

어느 집은 자식이 둘인데 이혼이 벌써 세번이래라든가, 아이 낳으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키워줄 거죠 해서 아니 나 믿고 아이 낳치 말라고 말했다가 자식과 의가 상했다는 하소연 등이 요즘 부모세대들의 중요한 화제다. 이혼율의 상승과 거기에 따른 후유증을 같이 겪어야 하는 부모세대들은 그들대로 자구책을 마련하려 하고 있고 인생말년에 이혼한 자녀의 아이들을 맡아 키워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셈이다. 파출소 동지인 내 친구들은 요즘 혼기가 늦어지는 자녀들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녀들의 결혼에 깊이 간여해야 할지 발을 빼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렇게 이혼이 흔한 세상인데 무조건 결혼을 재촉할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동거를 해보고 평생 살 마음이 생긴 다음에야 결혼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가라는 조심스런 결론을 내렸다. 젊은 시절, 서구에선 그렇게 한다는 말을 들으면 걔네들은 정조관념도 없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세대들이 이혼이라는 불상사와 아이까지 맡아 키워야 하는 눈앞에 닥칠지도 모르는 불행을 막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득 한 친구가 실은 우리 아이들이 실험동거 비슷한 짓들을 하느라 혼기가 늦는 것은 아닐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갑자기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우리 모두 근심 한 보따리식을 새로이 떠앉고 복잡한 심정으로 헤어졌다.

(지금은 사라진 명동 한일관 옆 파출소에 우리가 잡혀 있던 시간은 10분이 채 안 된다. 사과 받아내고 거수경례까지 받고 보무당당하게 파출소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끄지 않은 채 소파에 버티고 앉아서 잡아온 근거를 대라고 대차게 들이대자 이 미친 것들 뒤에 뭔가 큰 빽이 있으리라 지레 짐작했던 모양이다. 파출소 문 앞에 몰려든 구경꾼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김선주/ <한겨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