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식으로 얘기하면 나는 벌레로 살아왔다. 물론 나 같은 범부의 속류적 해석에 따를 때 그렇다는 얘기다. 적어도 나는 꽉 짜여진 현대의 조직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레고리 잠자를 벌레로 변신시킨 상념, “식구들만 아니라면 이런 일은 이제 집어치웠으면” 하는 생각은 언제나 실천됐다. 아니 애초에 식구들 때문에 하기 싫은 어떤 일을 한 적이 없으니 나는 원래 벌레였다. ‘세상인간’(Das Mann)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불행한 아내의 몫이었다.
전적으로 내 무능력 탓이겠지만 나이 마흔 중반에 이르도록 이룬 것이 하나도 없는 데는 이렇게 ‘벌레’로 산 것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남들보다 대학을 늦게 졸업한 것은 시대상황 탓으로 쳐도 보통 2∼3년이면 따는 석사학위를 7년 만에 받은 건 내가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10년이 넘어서 이제는 제출자격조차 말소된 박사학위도 그 때문이라고 해두자.
내가 방송을 시작한 것도 우연이었다. 5년 동안 이름을 날리던 전임 진행자가 국회의원이 되는 바람에, 그럴듯한 ‘말빨’을 찾아 헤매던 기독교방송 피디의 테스트 제의에 나는 재미삼아 응했고 그것이 3년여 방송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진행을 맡은 그해 9월, 기독교방송 노동조합은 파업에 들어갔다. 내가 안달을 하면서 매일 사장을 비판하고 노조를 옹호하는 내용을 내보낸 것도 내가 원래 벌레라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방송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기독교방송의 전통 덕에 무려 석달이나 버티다가 그해 마지막 날 결국 나는 ‘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벌레여서 그랬는지 그다지 충격이 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방송은 마약이었다. 결국 별 고민없이 학계에서 한 걸음씩 멀어져서 다른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프로그램도 그리 오래 하지 못했다. 각각 ‘짤린’ 이유가 다르니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결국 내 ‘벌레’ 근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카프카의 벌레가 집과 사회에 무책임한, 좋게 말해서 한없이 자유롭고 싶어하는, 나 같은 인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옛 기억을 더듬어본다면 카프카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촘촘하게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끊었을 때 과연 무엇이 남을까” 하는 실존적인 문제였던 것 같다. 내가 공부해온 경제학에 따른다면 원래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지만 사람에 따라 촘촘함의 정도는 다를 것이니 내 멋대로 카프카의 뜻을 ‘해석’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카프카까지 ‘변신’시키면서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내 이야기를 주저리 쓴 것은 내가 이제 생애 처음으로 본격적인 ‘세상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딱 4주 동안 독자가 되어주신 여러분께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이나 다른 매체의 독자에게도 이 지면을 빌려 고맙고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린다. 특히 맨 처음부터 나와 어울리지 않았던 <씨네21> 독자들에게는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우리의 후덕한 편집자들이 ‘어울리지 않음’을 ‘색다름’으로 해석해서 계속 쓰도록 배려해준 것에도 감사를 드린다.
물론 세상인간으로 오래 살 생각도 없고 또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왕 세상인간이 될 바에는 진짜배기 세상인간으로 살고 싶다. 스스로 진흙탕에 몸을 담그고 쓰레기도 뒤집어쓸 요량이다.
1년여, 또는 5년을 그렇게 살고도 내가 벌레의 속성을 잃지 않고 있다면 다시 여러분을 뵐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레고리 잠자의 올바른 순서를 밟는 것이기 때문에 혹시 훨씬 더 깊은 사유를 보여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족> 말없이 떠나지 못하고 변명을 하려면 짧을수록 좋은데 아직도 채워야 할 매수가 남아서 혹시 나 같이 ‘거꾸로 변신’을 강요받을지 모르는 분들께 충고를 드린다.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하면 위험해진다. 특히 빼어난 사람을 사랑할 때는 일정한 거리를 두시기를….정태인/ 경제평론가
* 정태인씨가 이 글을 보내온 12월 26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인수위원으로 임명됐습니다. 본격적인 ‘세상인간’, 정치인이 됐기 때문에 언론 매체에 글을 쓰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의사를 글과 함께 전해왔습니다. 그가 ‘벌레’로 겪었던 경험이 정치에 도움이 될 것을 믿어마지 않으면서, 건투를 빕니다. -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