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 결과를 놓고 누군가는 이런 말을 던졌다.“감성이 이성을 눌렀다.” 휴머니티를 앞세운 노무현 당선자의 감성 마케팅이 정치 경륜 및 비전 등을 이성적으로 전달한 이회창 후보의 대선 광고에 비해 더 호소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미디어 선거가 좀더 본격화하고, 또 다채로워진 이번 대선에서 TV 광고가 얼마만큼 투표결과에 영향을 끼쳤는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노무현 당선자의 광고 전략이 우세했다는 해석은 선거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광고적인 기교에서는 비유, 은유, 비교 등의 수사법을 활용한 이 후보쪽의 CF가 한 단계 앞선 것이었다.그러나 2002년의 광고계 트렌드에서 엿볼 수 있듯 요즘 시류에는 따지는 과정이 필요한 새로운 무엇보다 누구나 아는 대중적인 주제를 감성적으로 매끄럽게 포장하는 게 더 주효한 것 같다.
또 한해가 가고 새해를 맞는 현재도 예쁜 감성의 CF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여기저기서 하얀 눈과 천진한 아이를 동원해 순수와 희망을 노래하느라 바쁘다.그 가운데 특히 시선을 잡는 감성 마케팅 대결이 있다.
따근한 커피 한잔이 그리운 겨울철을 맞아 광고 공세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맥심과 테이스터스 초이스(이하 초이스)의 레이스다.
더욱이 이번 대결은 새 빅모델이 가세해 흥미롭다.정상급 영화배우를 모델로 기용해 넘버1 브랜드의 위상을 전해온 맥심 CF는 한석규 대신 이정재를, 여성 모델만 고수해온 초이스는 처음으로 배용준이란 남성 모델을 앞줄에 세웠다.
한석규의 내레이션에 이미연이 심은하, 고소영 등 이전 모델의 바통을 이어받아 ‘여자라서 행복하다’를 설파해온 맥심 광고는 남자 모델을 교체하면서 캠페인도 새 단장했다.이번 광고는 이정재 주연의 ‘남자’편과 이미연 주연의 ‘여자’편으로 이뤄져 있다.주제는 사랑했다가 헤어진 연인의 10년 만의 재회. 체코 프라하의 어느 다리 위를 홀로 걸으며 아련한 표정을 짓고, 집에 돌아와 맥심 커피의 맛과 향을 음미하는 모델의 모습이 잔잔하게 이어진다.그 위로 흐르는 내레이션과 배경음악은 광고의 내용을 풍부하고 드라마틱하게 포장한다.
안성기의 중후하면서 나긋한 목소리를 타고 ‘십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 정재의 마음이 흔들립니다’(‘남자’ 편), ‘다 잊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재를 본 순간 미연의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여자’편) 등의 해설이 덧붙여지면서 모델의 사연이 구체화한다.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을 오케스트라 연주곡으로 리메이크한 배경음악은 멜로의 향취를 잔잔하게 돋운다.
메인 카피는 ‘사랑의 향기는 영원하다’로 맥심의 진한 향을 강조하면서 브랜드 파워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알면서도 속는다고 맥심 광고는 늘 뻔한 얘기로 승부를 걸지만 소홀히 흘려보낼 수 없도록 발목을 잡는다.모델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내고 광고에 맞게 운용하는 점, 카피에서 소녀적 감성의 성인 버전을 유치하지 않게 구현하는 것 등은 돋보이는 특기다.
이 CF가 커피의 맛과 향을 사랑과 그리움으로 대체했다면 초이스 광고는 여유와 세련이란 감성언어로 맞불을 놓았다.
배경은 욕실.욕조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배용준이 커피를 마시며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는다.모델의 표정을 통해 입 안 가득 초이스의 맛과 향이 퍼지는 순간의 행복감을 표현한 뒤 마지막에 모델의 입을 빌려 차별적인 슬로건을 전한다.‘이제 커피도 인생도 한 박자 천천히’라고.
연속성이 강화된 사랑 이야기로 새 캠페인의 포문을 연 맥심 광고와 비교하면 초이스 광고의 변신 폭은 제법 넓다.그동안 전문직 여성의 활동적이고 앞서가는 이미지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아온 데서 벗어나 남성 모델이 주름잡는 정적인 감성 광고로 대대적인 전환을 꾀했다.모델의 연기력을 과시한 게 좀 흠이랄까.커피의 함의를 절묘하게 포착해 소비자의 공감을 사는 데 일단 성공하고 있다.
풍족하고 세련된 기존의 기조를 유지하며 차별성을 띠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두 CF가 이제는 칼 대 총이 아닌 비슷한 무기로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승부의 결과가 더 궁금하기도 하다.
초이스쪽이 밝힌 변신의 변에는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커피의 한국적인 가치를 전달하고 감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기 위해 감성을 강화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한국적인 가치.그것은 토종 브랜드인 맥심 CF가 클래식하고 순응적이며 보편적인 테마를 통해 앞질러나가는 대신 과거와 현재에 발을 디뎌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온 것을 겨냥한 말일 것이다.
두 CF는 누가 잘났고 못났고를 떠나 우리네의 감성시계가 도발하고 폭발하기보다 잃어버린 기본 가치를 복원하고 싶어하고, 또 숨을 고르며 따뜻하게 위로받기를 원하는 곳에 멈추어 있음을 이구동성으로 알려주고 있다.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