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리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2002년의 마지막 글이니만큼 올해 내가 본 영화 가운데 최고작에 대해서 쓰련다. 대충 추려보니 올해 개봉작 중 나의 ‘오! 컬트’는 세개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두 작품은 최근 기사가 나왔던 영화이므로(어떤 분야건 ‘최근’일수록 나의 ‘최고’가 되는 데 유리하다. 금방 까먹기 때문에) 그나마 시간이 좀 지난 영화를 소개하겠다. 도라 버치의 발칙한 눈빛이 아직도 선연한 <판타스틱 소녀백서>다.
이 영화를 보고 읽었던 몇개의 기사 가운데 호버먼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주인공 이니드 같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맞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도 내가 깔깔거리고 박수를 치며 열광하는 건 이니드나 레베카에서 너무 많이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좀 쓸쓸했다. 원래 고통스럽고 편치 않은 어떤 풍경을 보면서 맞아, 그래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 그 고통을 모르거나 이미 오래 전 졸업한 사람들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어렸을 때 나랑 너무 비슷하다”고 말한 누군가에게는 속으로 ‘놀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좋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안정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이 자신은 아무런 꿈도 기대도 없었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 좀 재수없다. 나 역시 일찍이 주류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으로(뭐 아니라고 나 주류 아니었어) 이니드와 10대의 나를 동화시키는 건 위선 또는 괜히 잡는 폼 같다.
그렇다고 뭐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있는 권리까지 박탈되는 건 아니겠지. 나에게 두 소녀가 사랑스러웠던 건(아! 이 표현은 꼭 나를 이 친구들의 엄마 세대로 만드는 것 같다) 지극히 냉소적이고 또래나 어른들을 서슴없이 조롱하지만 10대 특유의 감성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보랏빛 립스틱과 뿔테 안경, 파란색 랩터 티셔츠 차림의 이니드는 분명 또래들의 유행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초록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갔을 때 “네오펑크도 한물갔다구” 비웃는 친구들에게 “이건 오리지널 펑크버전이란 말야”라고 주장하는 이니드는 분명 인정받고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살아 있는 10대로 보인다. 호버먼의 표현을 빌리면 ‘둘 모두 극도로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둘은 자신감 없이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이니드는 밴드를 하기 위해서나 교육제도,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학교를 때려치우고 가출하는 ‘있어 보이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주인공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보이는 것뿐이지 아마 함께 학교에 다녔다면 1번이나 2번으로 불리는 애일 것이다. 그저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들의 감성은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루저의 그것이다. 불만 가득하지만 세상과 맞장뜨고 싶다는 욕망이나 의지도 박약한.
이니드가 마지막에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버스를 타고 갔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되기 싫어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미술가이든 엄마이든 웨이트리스이든 이니드도 무엇인가 될 것이다. 한 십년 지나면 <판타스틱 소녀백서>라는 영화를 보며 킬킬거릴 수도 있겠지. 어차피 성장 또는 늙음이란 자신을 후벼팠던 상처들과 화해하고 그 흉터에 대해 무덤덤해지는 것이니까. 김은형/ <한겨레> 문화부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