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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겨울 되길
2002-12-18

신경숙의 이창

지난해 이맘때쯤 자주 오고가는 길목의 뜨개질 방에 후드가 달린 빨간색과 베이지색 스웨터가 걸렸다. 뜨개질 방이란 내가 붙인 이름이고 그 집 이름은 ‘예림방’이다. 서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가게가 아니라서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자연히 시선이 그 집 진열장을 향하곤 했다. 두 스웨터 중에 빨간색이 내 마음을 끌었다. 빨간색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랑하는 그녀가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한번은 그 집에 들어가 스웨터 값을 물었더니 삼십오만원이라고 했다. 손으로 직접 뜬 것이니 공정만 쳐도 그만은 할 터인데도 그때는 왜 그렇게 그게 값이 세게 느껴졌는지. 내가 아쉬워하니 그 집 주인은 내게 뜨개질을 배워보라 하였다. 뜨는 방법은 다 일러주겠다지만 시간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그냥 돌아 나오면서도 내내 아쉬웠다. 해가 바뀌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는 동안 스웨터 두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 그 집 앞을 지나다보니 빨간색만 홀로 걸려 있지 않은가. 이후로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그 빨간색마저 그 진열장에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러다가 드디어 며칠 전 그 집 앞을 지날 때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다림질을 하고 있고 아주머니 둘과 운동화를 신은 앳된 처녀 한 사람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빨간 스웨터를 만지작거렸더니 주인여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곁에 늘 함께 걸려 있던 베이지색 스웨터 이야기를 꺼냈다. 내내 그 집 앞을 지나다니며 그 스웨터를 눈여겨보던 여선생이 며칠 전에 사갔다고 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던 모양이다.

뜨개질 방의 아주머니 두분 중에 한 아주머니와 앳된 처녀는 모녀였다. 수시에 합격한 딸이 남자친구와 채팅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거 못하게 하려고 뜨개질을 배우러 같이 다닌다고 했다. 앳된 처녀는 스웨터를 하나 떠보더니 크리스마스 때 남자친구에게 선물하겠다며 같은 색으로 또 하나를 뜨고 있는 중인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커플 스웨터다. 남자친구에게 입힐 스웨터를 손으로 짜는 처녀가 아직도 세상에 존재하네, 싶어 그들의 얘기에 귀기울였더니 뜨개질 바늘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처녀가 갑자기 근심스럽게 엄마 되는 이에게 묻는다. 그런데 엄마, 헤어지게 되면 이 스웨터를 어떻게 해야 돼 엄마 되는 이의 대답. 글쎄 태워야 되나 어째야 되나 반지는 빼서 돌려준다는데 돌려달라고 해야 되나 듣고 있던 주인여자가 아니, 헤어질 걱정을 하면서 그 수고를 하고 있는 거야 물었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두요, 처녀가 명랑하게 웃었다. 그들 연인은 만나면 두 시간은 걷는단다. 뜨개질을 하고 있는 처녀가 고3을 지내느라 다리 힘이 약해진 탓이란다. 그래서 처녀의 엄마가 딸의 남자친구에게 데이트할 때 무조건 한 시간씩 걷게 해라, 했더니 두 시간을 걷게 해서 지금 뜨개질을 하고 있는 처녀의 다리 힘이 세졌단다. 빨간 스웨터를 매만지며 귓결로 그들의 얘기를 듣다가 나는 내가 그들의 일행인 줄 착각한 모양으로 그런 사람하고 왜 헤어진다는 거예요 참견하고 말았다. 이게 다 중년 여자가 되어가는 징조일 것이다. 엄마 되는 이가 그런다. 너무 어리잖아요. 이제 겨우 스무살인데. 그도 그렇긴 하다. 이제 스무살인데 어떻게 미래를 장담하겠는가. 이젠 대화에 끼어든 나보고 묻는다. 헤어지게 되면 커플 스웨터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냥 간직하세요, 추억으로요. 추억요 처녀의 엄마가 뜨개질을 잠시 멈추고는 그런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부자라고 하더라. 생각나면 어떡해요 생각해야지 어떡하긴요.

빨간 스웨터를 사러 들어왔다가 보기 좋은 모녀와 수다를 떨게 되었다. 세상은 이런저런 일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데, 당장 수시에 들지 못한 수험생들이 선택을 놓고 밤잠을 못 이룰 때인데, 이런 모녀도 있구나 싶은 게 부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수다를 접고 빨간 스웨터 값을 물으니 주인여자가 삼십만원하다가는 지난해에 짠 것이니 오만원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먼지가 묻었으니 세탁비로 또 오만원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지난해에는 삼십오만원이라고 했잖은가. 셈을 해보니 지난해보다 자그마치 십오만원이나 싸게 주고 사는 거였다. 진열장 바깥에서 일년 동안 그 스웨터를 지켜보는 동안 이미 값은 극복된 상태였으나 완전 세일가격에 산 셈 아닌가. 어찌 그리 셈이 빨리 되며 싸게 싼 것이 왜 그리 기쁘단 말인가. 이것도 사십줄로 들어가는 여자의 마음이려니 싶어 서글프기도 했다. 어쨌든 빨간 스웨터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올렸던 그녀의 생일이 곧이니 그녀에게 따뜻한 스웨터가 되었으면 좋겠다.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