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연도 2001년, 광고주 Riccardo Cartillone 대행사 Scholz&Friends,
Berlin 아티스트·카피라이터 Bjorn Ruhmann
‘단조로운 것은 生의 노래를 잠들게 한다.머무르는 것은 生의 언어를 침묵하게 한다.人生이란 그저 살아가는 짧은 무엇이 아닌 것. 문득-
스쳐 지나가는 눈길에도 기쁨이 넘치나니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1980년대에 히트한 슈발리에 구두광고 카피이다. 얼마 있다가 그것을 그대로 옮겨 작품의 일부로 만든 시가 나왔다. 거기까지는 모양이 좋았다.
광고가 시의 재료가 되고 영감의 모티브가 되었으니…. 광고가 바야흐로 세상에서 대접받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됐다. 문제는 엉뚱하게 불거졌다.
시인은 카피라이터에게 일말의 양해도 없이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라는 부분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는 만용을 감행했다.
격분한 카피라이터(copywriter)는 당연히 자신의 ‘카피라이트’(copyright)를 주장하고 나섰다. 어느 카피라이터의 에세이집에서
읽은 내용인데 그뒤 사태가 어떻게 풀어졌는지는 듣지 못했다. 아무튼 그 구두제품은 카피 하나로 ‘가끔’이 아니라 오래오래 주목받는 브랜드가
돼버렸다.
1990년대에 이 브랜드는 “7cm 자신감”이라는 카피로 또 한번 여자들의 마음을 훔쳤다. 콧대 높은 여자의 도도한 표정과 거만한 포즈,
고급스런 제품의 실루엣… 거기에서 오는 판타지는 여자들의 구매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구두 광고는 죄다 디자인이나 컬러 등의 패션을 팔거나 발이 편한 구두, 가죽의 품질차이 등 기능성을강조하는 표현전략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7cm 운운하고 나섰으니 소비자뿐만 아니라 광고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그 한마디에 쏟아부어진 엄청난 광고비와 프로모션 비용을 생각하면 소비자들은 슈발리에 구두굽 1cm에 얼마만큼의 돈을 지불한
셈일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봐도 브랜드의 가치를 한껏 부풀린 교묘한 광고전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구두에는 신분상승의 코드가 담겨 있다. 왕자가 애타게 찾는 유리구두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평민에서 왕족으로 변신하는 것을 의미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다는 것은 여자의 자존심을 끌어올리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현대판 여성의
신분상승인 것이다.
높아서 좋은 건 뾰족구두만이 아니다. 오똑한 콧날, 봉긋한 가슴, 길쭉한 다리가 자존심의 키를 높이는 전략무기라는 데에 동의하는 여자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 같다. ‘원더브라’라는 이름을 가진 브래지어 광고는 해마다 크리에이터들의 자존심을 높여가고 있다. ‘리바이스’ 등의
청바지 광고가 내뿜는 크리에이티브 열기는 새삼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중에서도 독일의 여성구두 브랜드 Riccardo Cartillone의 재치는 단연 압권이다. 요런조런 남자들의 정수리를탑뷰(top-view)로 보여주면서 굽 높은 구두를 신는 여자의 쾌감을 풍자하더니 이번엔 장난기가 도를 지나친다 싶다. 도대체 사람들 꼴이
저게 뭔가? 왜 저렇게 망가뜨려놓고 있는 건가? 멀쩡한 남자들이 보기에도 민망한 난쟁이 모양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름대로 한 인물하는
신사들이 하나같이 짜리몽땅 납작해진 모양을 하고 위를 올려보고 있는 형국이다. 폴로경기를 하고 있는 건장한 신사, 고급자동차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내, 거대한 컨테이너를 청소하는 미화원 아저씨, 나이트클럽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제비족…. 그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들은 왜 저리도 오종종해 보이는가?
이 남자들 앞에서 거만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당신은 여우다. 더욱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힐’(Highest Heels)이라는 슬로건의 도움이 없이도 그랬다면 구미호라는 애칭을 주겠다. 아니, 사실은 이 광고읽기에 그렇게 대단한
총기가 동원될 이유는 없어보인다. 약간의 비주얼 상상력, 디지털 사고방식, 기호에 대한 친숙함만 갖추고 있다면 이 광고는 쉽사리 해독의
실마리를 내밀어보인다.
‘7cm 자신감’도 대단한 면도날이었지만 이 광고의 카메라앵글은 그야말로 우리들 의식의 빈틈을 팍 찌르는 송곳이다. 문자언어가 소멸하고
시각언어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의 세례. 시각적 표현의 진화에는 끝이 안 보인다.
또 하나, 이 광고의 제작스탭을 눈여겨보자. 카피라이터와 아티스트가 동일인물로 표기되어 있다. 굳이 카피라이터와 아티스트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었다는 얘긴가?
이제 카피라이터가 촌철살인 한마디를 던지고 아티스트가 거기에 걸맞은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행복한 동업’은 끝났는지 모른다. 카피와 비주얼은
이미지의 기호적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구조조정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현우 | 프리랜서 카피라이터·광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