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화요일 밤 10시
<몽골리안 루트>(진기웅, 손현철 연출)는 ‘루트’(route)라는 말이 의미하듯, ‘길’과 ‘뿌리’에 대한 보고서다. 몽골로이드(mongoloid)라
불리며 세계 각 지역에 분포해 살아가는 아시안 인종의 삶을 다루며, 그 속에서 한국인의 뿌리도 아울러 되살핀다는 게 목적이다. 인간의 역사가
정착과 문자의 역사라면, 이들 몽골로이드의 행동반경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실제로 존재하되, 역사에는 빠져 있다.
그런 그들의 ‘잃어버린’, 조금 공격적으로 표현하자면 ‘빼앗긴’ 역사를 복원하는 일에 KBS가 앞장섰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얼마 전 <수요기획>이라는 다큐 프로그램을 취재하던 중 제작자의 입에서 ‘몽골리안 루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다큐멘터리라는 게 소재가 반은 먹고 들어가는데… 구미는 당겨도 여건이 맞지 않아 덤비지 못하는 게 많아요.
‘몽골리안 루트’ 같은 게 딱 그런 거죠. 한번은 꼭 해보고 싶은 소재인데….” 그가 말하는 여건이란 물론 제작비를 의미한다. 한편으로
제작기간도 고려해본 소리일 것이다. 도대체 ‘몽골리안 루트’가 무엇을 말해주길래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이토록 탐내는 것일까. 또한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숙원사업 <몽골리안 루트>의 탄생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KBS가 3년6개월의 제작기간과 10억원의 제작비를
투자해 지난 2월6일에 첫 방송을 내보낸 뒤, 다음달 27일 8부작의 여정을 맺은 <몽골리안 루트>를 재평가해본다. 뒤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재방영 요청과 ‘역사인식의 또다른 왜곡’이라는 부정적 평가 등 네티즌들의 엇갈린 반응이 계속되는 지금, 한국 다큐멘터리
제작의 현주소를 살피는 적절한 시기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민족적 요구보다 보편적 접근
3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98년 1월, SBS에서 먼저 선수치듯 <몽골리안 루트를 가다>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를 내놓는다.
KBS의 <몽골리안 루트>팀이 본격적인 해외 촬영을 막 시작한 때였다. 기획단계에서 소재가 샜다는 소문도 있었다. KBS 신관
5층 국제회의실 옆 특별기획팀은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벌써 10년 이상 준비해온 아이템을, 그것도 촬영까지 돌입한 상황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촬영 강행. 다행인지 불행인지 <몽골리안 루트를 가다>는 준비 기간 부족과 제작 여건의 부실로 함량미달의 프로그램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무엇보다 단순기행식 구성이 <몽골리안 루트>와는 애초에 달랐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타이의 이웃들> <한민족 뿌리탐사> <반도문명론> 등 기획 초기에 등장한 여러타이틀이 증명하듯, 촬영 내내 프로그램의 방향 잡기는 혼선을 거듭한다. 이야기의 크기와 깊이를 생각하자면 지나치게 국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발상은 배제해야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해외수출용으로 쓰일 것에 대한 이해도 포함되었다. 결국 한민족의 뿌리 찾기는 뒤로 가려지고, 보편적인
인류 확산의 내용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갈등도 없지 않았다. 민족주의적인 발상의 배제는 민족적 요구를 외면하는 듯해 아쉬움을
표명하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민족의 근원에 대한 확실한 이해없이 인류의 지구확산이라는 주제는 자칫 공명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마리의 토끼를 좇는 일은 불가능했다. ‘나의 근원은 어디인가’ 혹은 ‘한반도의 화려했던 과거를 재현하는 건 아닌가’ 하고 잔뜩
기대한 시청자라면 확실히 성에 차지 않을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방대한 자료 수집과 과학적 접근으로, 인류학적 상상력으로만 가늠하던 몽골로이드의
세계확산 가설을 시원하게 규명했다는 점에서 대체로 호의적인 평가다. 그러나 그 한 마리 토끼마저도 제대로 낚지 못했다는 반응이 조심스레
대두되고 있다.
‘이반’의 역사, 객관적 심판대에 오르다
프로그램의 부족분을 짚기에 앞서, 먼저 분명히 존재하는 장점부터 얘기하도록 하자. 대부분의 시청자가 느꼈듯이, 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역사는
‘일반’의 역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반’의 역사에 가깝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워온 역사의 관점에서는 유럽, 중국 등 정주문명의 패권국들이 그 주인공이다. 역사가
짧은 미국도 이쯤 되면 쉽사리 명함을 들이밀지 못한다. 예컨대 세계사는 ‘정착민’의 관점에서 ‘기록된’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목민의
역사는 진지하게 다뤄지기보다는, 문명의 발전에 무질서와 공포를 가져오는 돌출현상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역사 기록 가운데 그들의 존재가
주로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무리로 기록된 것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그 가장 극적인 사례가 몽골제국의 역사일 것이다. 칭기스
칸으로 대표되는 대제국의 역사가, 세계사에서는 단지 유럽사와 중국사 사이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태 정도로 다뤄진 채 넘어간다. 그러나 <몽골리안
루트>는 후반부(5∼8부)의 내용을 통해, 유목문명의 세계사적 영향력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몽골로이드의 이동과 확산이라는 큰 틀 아래에서 그 착근과정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여, 편협한 논리로 섣불리 강요하려 들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세계확산은 세 가지 논리로 이해될 수 있다. 자연과 교접하는 정신세계, 세형돌날 등의 기술적 기반, 한랭기후에
적응된 신체적 특징이 그것이다. 이는 시청자의 자연스런 이해를 돕고 극의 전개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게끔 이끈다. 또 하나, 특수 영상의
적절한 사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 전체 그림의 30%를 차지하는 컴퓨터그래픽이 부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으나, 사라진 역사의 현장을 복원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특히 여타의 프로그램에서 보여지는 CG와는 질적으로
향상된 느낌을 주었는데, 모션캡쳐 애니메이션 방식이라는 최신 기법을 도입한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프로그램인가
그럼에도 불구, <몽골리안 루트>는 확실히 모호한 인상을 풍긴다. 그것은 일단 정체성의 모호함이다. 다시 말해이 프로그램은 ‘누구를 위한 프로그램인가’ 하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내용의 모호함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와
‘과연 새로운 시각인가’ 하는 점이다. 차근차근 순서대로 풀어보자. 먼저 프로그램이 소구하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대상을 확인하면 될 것이다. 당연히 한국사람 아닌가 하겠지만, 여기서 조금 망설여진다. 해외수출을 고려해 ‘글로벌’하게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고 궁금점을 풀어보자.
여기서 확인하고자 하는 바는, 제작진이 굳이 민족적인 색을 포기하고서라도 얻으려고 한 ‘세계성’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곧바로 내용적인 측면과도 연결이 되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새로운 역사해석이 사실 외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먼저의 질문에 답하자면, <몽골리안 루트>는 ‘한민족의 발자취’라는 주제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인류사와 조화시키려 가상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청자에게 ‘이거다’ 하는 선명한 메시지를 안겨주지 못한다.
두 번째로,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인류문명이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이동을 통해 신대륙으로 번져간 사실은 학계의 통설로 이미 굳어진 내용이다.
우리보다 훨씬 다큐멘터리 제작 여건이 좋은 서구에서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혹시 다행스럽게도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 하더라도,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의 프로그램이 얼마만큼 소구력을 가질 것인지도 의문인 건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자국의 시청자와 외국 시청자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작품이 될 공산이 크다. 이제 정리하자면, <몽골리안 루트>의 등장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하나 이것이 종착점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좀더 심도깊은 연구와 자료분석, 환경조사를 통해 우리만이 얘기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담을 때 정말 ‘글로벌’한 경쟁력을 갖춘 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무조건적인 세계화의 결망.다큐멘터리의 공멸이다
글 심지현 | 객원기자
사진제공 KBS 홍보실
▶ <몽골리안
루트> 제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