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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신문이 만난 사람 ┃ 토머스 에디슨 ■
“영화 만드는 데는 예술적 기술이 필요”
1905년 5월6일, 미국 법원이 ‘여러 장면 영화’의 사진 저작권을 인정했다. 이로써 여러 장면 영화들의 무단복제와 판매 등이 불가능하게 됐다. 이 소송의 피고는 에디슨사였다. 현재 미국 최고의 영화제작자로 군림하고 있는 토머스 에디슨은 또한 ‘소송의 제왕’이기도 해서, 특허권 침해 혐의로 경쟁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인가 하면, 지난 1902년에는 원고가 되어 저작권 소송을 벌였다. 하지만 이번 소송에서는 그가 패자가 됐다.
지난해 바이오그라프사가 당신 회사가 <퍼스날>을 임의로 리메이크했다는 혐의로 소송을 걸었다.
→ 성립이 안 되는 소송이었다. 영화의 저작권은 그것이 한 장면으로 된 영화일 땐 인정된다. 그것이 법원의 판례였다. 내가 소송을 제기했을 때, 법원은 “한 장소에서 찍은 프레임들은 그 통일성이 인정되며, 따라서 영화 한 장면은 한장의 사진으로 간주된다”고 판결했다. 따라서 여러 장면이 편집된 영화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성립될 수 없다.
반면, 바이오그라프사는 “이미 영화는 한 장소에서 하나의 사물, 사람을 찍는 것을 넘어서 에피소드와 사건들을 통해 인물들의 연속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한장의 사진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도 그걸 인정했고.
→ 프린트 자체를 복제했다면 모를까, 이야기를 리메이크한 걸 가지고 소송을 걸다니, 말이 안 된다.
그러는 당신도 1902년에 루빈사를 무단복제 판매 혐의로 고소하지 않았나.
→ 문제가 다르다. 그건 한 장소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찍은 한 장면짜리 영화였다.
당시 루빈사는 사진은 카메라 기능의 결과일 뿐이라서 영화는 예술이 될 수 없으므로 저작권 보호는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영화 만드는 데 얼마나 대단한 예술적 기술이 필요한데.
그런데 왜 ‘사진 저작권’이 문제인가.
→ 아직 영화 저작권에 관한 법적 규정이 없다. 사진 저작권만 있다. 따라서 영화를 사진으로 인정받아야만 저작권도 보호받을 수가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용광로저렴한 입장료의 소규모 니켈로디언 대중에 인기, 보수층은 반발
니켈로디언(nikelodeon)을 아십니까 1니켈(nikel)을 내고 보통 1릴짜리 영화를 볼 수 있는 200석 규모의 작은 극장(odeon). 이 니켈로디언이 1905년 이후 미국 전역에서 버섯처럼 번져가고 있다. 주요 상영장으로써 보드빌이 누렸던 영화가 이제 니켈로디언으로 이양되고 있는 것이다. 니켈로디언의 확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입장료가 싸다. 니켈로디언 이전 영화는 중산층의 오락이었다. 곧 영화가 전체 프로그램의 일부에 불과했던 보드빌쇼는 노동자들이 보러 다니기에는 비싼 편이었다. 하지만 니켈로디언이 생기면서 노동자들의 극장 출입이 쉬워졌다. 최근 노동시간 단축으로 여가시간이 늘어난 노동자들은 꾸역꾸역 니켈로디언으로 향하고 있다. 그에 따라 니켈로디언은 주로 도시의 상업지역과 노동계층의 주거지에 생겨나고 있다. 그렇다고 노동자들만 니켈로디언에 갔던 것은 아니다. 실상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니켈로디언에 앉아 영화를 관람했다. 이런 이유로 어느 평자는 니켈로디언을 “미국 민주주의의 용광로”라고 부르기도 했다.
니켈로디언의 확산은 1릴짜리 영화(상영시간 15분)의 보편화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극장업자들은 늦은 오전부터 자정까지 계속해서 같은 영화를 틀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익이 엄청나다. 게다가 파테의 선언 이후 프린트가 판매 대신 임대되면서 극장주들은 별 부담없이 프로그램을 자주 바꿀 수 있다. 일주일에 일곱번이나 프로그램을 바꾸는 극장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극장마다 단골들이 생겼다.
상영업자들은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영화의 재미를 돋우려고 노력한다. 영화를 상영하면서 줄거리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피아노 반주나 축음기를 이용해 효과음을 내는 경우가 많다. 더러는 배우들이 스크린 뒤에 서서 화면 위의 인물에게 맞춰 대사를 읊기도 하며, 소음창조기를 이용해 적절한 음향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편, 니켈로디언을 통해 영화가 전 대중의 오락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영화에 대한 보수층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1907년 <시카고 트리뷴>은 “오센트 극장이 아이들에게 가장 저열한 열정을 심어주고 있다”라며 니켈로디언을 비난했고, 기독교계에서도 영화로 인한 대중의 타락을 염려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켈로디언 붐은 꺾일 것 같지 않다. 현재 주요한 니켈로디언 상영업자들로는 펜실베이니아의 워너 형제, 시카코의 칼 램믈, 매사추세츠의 루이스 메이어와 아돌프 주커, 윌리엄 폭스 등이 활동 중이다.
페이드 인 · 아웃
떠나는 뤼미에르 형제를 생각하며
영화의 나이, 7살이 되었다. 그렇구나, 벌써 그렇구나. 아니, 겨우 그렇구나. 발명 이래, 영화의 변화 속도는 가히 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다. 비교해보라. <공장문을 나서는 노동자들>과 <달세계 여행>을, 그리고 <미국 소방수의 생활>을, <로마의 점령>을. 이제는 아무도 <공장문…> 같은 영화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영화의 효력은 이미 세기 전에 상실됐다. 이국의 풍경을 담은 영화 따위는 구닥다리가 된 지 오래다. 더불어, 뤼미에르 형제처럼 영화 관련 발명품을 만들려고 낮밤을 새우던 그 많던 과학자와 선구자들의 이름도 잊혀지고 있다. 그리고 올해,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제작을 중단했다.
진기한 발명품으로 세상에 나온 영화는 ‘이미’전세계적인 산업이 됐고, 예술의 모양새를 갖춰가는 중이다. ‘영화언어’도 수없이 많이 개발됐다. 편집의 방법만 해도 두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교대로 보여주는, 이른바 간격편집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되고 있으며 줄거리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간자막이 삽입되는가 하면, 벽그림이 차지하던 배경은 실제 사물들로 대체되고 있다. 또한 클로즈업, 슬로모션, 플래시백, 오버랩, 스톱모션 등 재미를 배가하고 구조를 정교하게 짜기 위한 기법들도 숱하게 늘었다. 이를 예술적 진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뤼미에르 형제는 그 진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던 건 아닐까 뤼미에르사에 이렇다 하게 내세울 영화제작자가 없었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방증이 아닐까 요컨대, 영화제작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파테의 제카가, 고몽의 앨리스 기가, 에디슨사의 포터가, 뤼미에르사에는 없던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루이 뤼미에르는 “용서하십시오. 만약 영화의 오늘 모습을 예견할 수 있었다면 나는 이런 것을 발명하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손을 벗어난 영화는 고삐 풀린 말처럼 달려나가고 있다. 그 말이 과연 어디에 가닿을는지. 아직 영화는 완성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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