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 종>(1961)을 만들 때의
일이다. 의정부 끝자락에 위치한 망월사라는 절이 촬영장소였는데, 카메라와 그에 딸린 발전기가 워낙 무거워
절까지 갖고 올라가는 게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니었다. 그때 촬영부의 최재형이라는 덩치 좋은 스탭이 짐을 떠맡게 되었다. 그는 한참을 씰룩대며짐을 옮겨놓더니 다짜고자 “어떤 xx가 이딴 장소를 헌팅했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주범은 다름 아닌 나와 홍 감독이었다. 우린 그저
웃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고생은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날씨가 더워 사극예복의 물감이 배우들의 피부에 묻어나와, 신이 끝나면 온몸이 파랗게
물든 배우가 한둘씩 생기곤 했다. <춘향전>의 참패 이후 홍성기와 김지미의 사이는 예전처럼 살갑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홍성기와의
스캔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인과 결혼한 염매리가 잠시 고국에 온 일이 있었다. 어쩌다 그 소식을 들은 홍성기가 그녀에게 연락을 했고,
잠시 얼굴을 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약속 장소에는 김지미가 나와 있었단다. 김지미는 화가 단단히 나서 염매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탁자를 뒤엎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 일을 통해 추측건대, 김지미의 홍성기에 대한 애정은 쉽사리 식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나, 부부의 정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듯 계속해서
닥치는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 앞에 두 사람은 결국 이혼을 선택하고 만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경임’이라는 딸은 결혼 전까지 홍 감독
밑에서 자라고, 결혼 뒤에는 김지미의 후원을 받았다. 얼마 전 홍 감독의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낸 딸은 어느새 마흔줄을 넘긴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때의 격세지감이라니.
김지미와 헤어지고 몇년간 홍 감독은 구멍난 적자를
메우느라 고생이 심했다. 그때 그의 밑에서 영화사 재정을 담당하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꼼꼼하고 알뜰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는 홍 감독의 빈 주머니에 그나마 돈이 쌓일 수 있도록 남몰래 애를 많이 썼다. 자기 일마냥 덤벼드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일까. 홍 감독은 그녀에게 결혼신청을 한다. 그녀의 이름은 김영진. 홍성기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 옆에 있어주었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이다.
그녀는 지난해 감독협회에서 감독의 날을 기해 마련한 ‘훌륭한 감독 부인의 상’ 시상식에 당당히 수상자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녀가 상을
받을 때 객석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박수를 보낸 사람이 배우 신성일이다. 그가 일어서자 앉아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전원 기립하여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어느새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려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인내와 희생으로 점철된 우리 마음속의 어머니 모습 그 자체였다.
그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달려와 속내를 털어놓고 의논을 하곤 했다. 유독 자존심이 강한 남편이 오직 내게만 흐트러진 모습을 허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홍 감독과 난 서로의 허물도 반가운 인생의 지기였던 셈이다. 홍 감독이 주머니가 궁해보일라 치면 난 그에게 슬쩍
주머닛돈을 나누어 넣어주곤 했는데, 남들에겐 절대 돈을 받지 않던 그도 내 돈만은 받아주었다.
언젠가 홍성기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뒤,
그를 만나러 갔을 때 난 너무나 가혹한 신의 처사에 분노하였다. 손발의 기력을 앗아갈지언정 말만은 남겨두었다면, 그 좋아하는 시도
즐기고 자신의 이력도 스스로 기록할 텐데, 홍성기에게 남겨진 유일한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단 한마디였다. 아마도 신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만은 남겨두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불편한 입을 열어 내는 ‘감사하다’는 말은 인간이 가진 어떤 말보다 겸손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홍 감독이 만든 영화들의 제목을 살피다보면, 그것은 마치 우연처럼 김지미라는 여배우와의 짧지만 사연많은 만남과 헤어짐의 역사를 기록한 듯이
보인다.<별아 내 가슴에>(1958)가 그녀와의 만남을 의미한다면, 그녀와 이혼 뒤 만든 <너와 내가 아픔을 같이 했을
때>(1970)는 이별을 아픔을 함께 나눈 두 사람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듯하다. 당시 이 영화에 김지미를 출연시키기 위해 이영철 촬영기사가
다섯번을 찾아가 설득을 했다. 이영철은 김지미의 오빠인 레슬링 선수 김지관과 친한 사이기에 앞장을 선 것이다. 그것이 이혼 뒤 그녀와 만든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잃어버린 홍 감독은, <처녀성>(1964)을 통해 육체파 배우 김혜정과 일시적인
커플을 이룬다. 이 작품은 외설시비에 오를 정도로 과감한 장면이 돋보였다. <처녀성>뿐만 아니라 바로 전에 제작한 <젊음이
밤을 지날 때>(1964) 모두 박계형의 흥행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나, 에로틱한 장면 연출의 한계로 흥행과는 멀어진다.
구술 심우섭 |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 <운수대통> 연출
정리 심지현 |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