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영웅본색>을 시작으로 홍콩누아르영화들이 한국의 젊은 관객에게 크게 어필하면서, 홍콩영화는 한국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가 한창 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때가 그 시기다. 사실 처음 홍콩영화 바람을 일으킨 <영웅본색>은 그렇게 맘에 들지 않았다. 검은 선글라스와 바바리코트의 윤발이 형님(?)이 쏘아대던 무한한 쌍권총의 총알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홍콩영화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었다. <영웅본색>이 한참 한국을 강타하고 지나갈 때쯤 재개봉관에서 홍콩영화 한편을 봤다. 한국 에로물 한편과 함께 튼 그 영화가 <천장지구>였다. 당시 이 영화는 유덕화의 찢어진 청바지와 오토바이로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했고 유덕화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한 친구가 있었다. 또래 친구들보다 덩치도 크고 얼굴도 조금은 험상궂어 별명이 마이크 타이슨이었다. 하지만 보기와는 전혀 딴판이다. 여자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수줍어하며 마음은 또 얼마나 착한지…. 이 친구의 버릇이 있다면 영화를 보고나서 항상 자기가 마치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과 똑같이 담배를 피운다든가 뭐 그런…. 친구의 우격다짐으로 보게 된 이 영화는 예상 외로 나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 친구 또한 영화를 보는 내내 흥분하고 유덕화와 오천련과의 안타까운 사랑에 마음아파하는 것 같았다. 극장을 나오면서 여전히 영화 속 장면처럼 담배 한 개비를 길게 빨아들인 뒤 허공을 향해 연기를 뿜어내며 오랜만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화 내용이랑 내 처지가 너무 비슷한 거 같다.”
얼마 전부터 학원에서 한 여자를 알게 됐는데 대단한 집 여자인 것 같다고 했다. 학원에서 몇번 마주쳤고 “하도 예뻐” 진짜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더니 예상 외로 친절하고 상냥해서 그날 이후로 조금 친해졌다는 거다. 다행인지 그 여자에게도 특별히 같이 다니는 친구가 없었지만 여자애가 집에 갈 때나 학원에 도착할 때면 여지없이 검정색 승용차가 3대 정도 따라다닌다고 했다. 마치 영화 속 보스의 딸처럼…. 그리고 항상 차를 타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 친구가 영화를 많이 보더니 상상 속의 인물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나도 한번 보자며 친구가 다니는 학원으로 갔다 .
그러나 며칠 동안이나 그녀를 보지 못했다. 사실 이 친구는 그녀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바보같이 그냥 만나서 잠깐씩 얘기한 게 다였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날 아침 그녀가 이 친구에게 준 노래 테이프에 <천장지구>의 주제곡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 순간 난 왜 이 친구가 이 영화를 그렇게 보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친구는 그녀의 전화번호, 주소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겨우 7일 정도였다고 했다. 그뒤로도 생각보다 심각하게 그녀를 찾아다닌 것 같았지만 찾지 못했다. 아직도 그 친구는 가끔 그 여자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녀와의 이야기를 상상해서 자기도 한번 시나리오를 써보겠다고 했다. 나보고 영화로 만들어줄 것을 약속해 달라며….
친구가 하도 심각해서 내가 만약 상업영화를 하게 되면 언젠가 꼭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천장지구>가 작품성이 뛰어나거나 영화적으로 충격을 줄 만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젊은 세대들과 연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는 역시 신분을 초월한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사랑은 해피엔딩보다는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울수록 사람들에게 더 가슴아프게 남는 것 같다. 내게도 이 영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친구의 사랑 이야기와 영화 속 장면들이 교차되면서, 마치 친구의 이야기처럼 상상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예전에 찍었던 단편영화들 대부분이 <천장지구>에 나오는 그런 사랑 이야기였던 것도 그때 이 영화를 본 기억 때문인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기억에서 잠자고 있는 슬픈 누아르 한편을 찍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