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사랑을 하면 색을 쓴다. 마음에 두었던 사람을 마주 대하면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뜨고 외출을 할 땐 옷장을 몇번이나 뒤져서 분홍색 원피스라도 찾아내야 만족하게 될 터이다. 군인 아저씨가 쓰는 무표정한 편지지보다는 꽃편지지가 좋고 검은색 볼펜보다는 은근한 색이 좀 있어줘야 사랑고백도 그럴싸하게 나올 터이다. 격렬한 사랑을 나누면 얼굴에는 복숭아색이 감돈다. 온 세상이 사랑 나누기에 전념하는 춘삼월에는 산에도 들에도 온통 붉은색, 노란색, 자주색, 색, 색, 온갖 꽃들이 색을 쓴다. 새들도 물고기도 곤충들도 온몸에 화려한 색을 치장하여 사랑을 갈구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색은 최음제. 색은 들통나버린 사랑. 색은 발정. 색은 즐거움. 색은 흥분. 색은 남다름. 색은 유명 유실 유감. 색은 쾌락. 색은 수많은 선택. 색은 경고. 색은 축하. 색은 감정. 색은 사랑. 색은 내 멋대로.
우리나라 사람이 흰옷을 즐겨 입는 백의민족이란 말은 나도 의심해본 적이 있다. 흰색이란 것도 비현실적이지만, 세계 어디 다른 민족에게서도 한 가지 특정색 옷을 즐겨 입는 민족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특별한 직업이나 전통의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무조건 ‘아무족이라는 민족은 파란옷을 즐겨 입는 민족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전세계 모든 민족들이 나름대로 특정색 옷을 즐겨 입는 것이 보편적이라면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이란 말을 믿어주겠지만 현실의 의복문화를 눈뜨고 보자면 백의민족이란 말은 터무니없을 뿐이다. 모두가 흰옷을 즐겨입는 민족이 실존한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과 자유와 자아를 규제받고 있는 영화 <플레전트 빌> 속 플레전트 빌의 오리지널판이다. ‘백의민족’이란 말을 만들어내고 범민족적으로 그것이 우리 민족의 보편타당한 의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이 사회를 플레전트 빌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제 멋대로’ 자기만의 취향을 드러내어 그것을 서로 즐기고, ‘제 맘대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고, 사람들이 기분따라 다른 색 옷을 골라 입듯이 탐미적인 삶을 누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류들이 있다. 그리하여 색동옷을 입으면 광대 취급했고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나돌아다니면 화냥년이요 머리를 염색하면 방송출연 금지였고 노란색 자가용이면 날라리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 그야말로 실존하는 플레전트 빌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색을 규제하는 것은 척박한 환경에서 떼지어 사는 겁쟁이들이 하는 짓이다. 사자가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초원에 사는 얼룩말들. 단 1초도 안심할 줄 모르는 물떼새. 그리고 고래밥 주제에 거대한 고래 모양으로 떼지어 다니는 멸치들, 이것들은 모두 포식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이 개개인에게는 전혀 없는 것들이다. 만약 무지개 줄무늬 얼룩말 몇 마리가 무리 속에 제멋대로 돌아다닌다면 그 무리는 포식자의 표적이 되어 무리 전체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이며 그나마도 멋대가리 없게 보임으로써 맛대가리 없는 존재로 여겨지게 하기 위해서 모든 개체가 자기만의 색을 포기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그런 무력한 겁쟁이 동물의 세계에서는 백의민족도 있고 황의민족도 있고 홍의민족도 있다. 얼마든지 있다. 때로는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인간의 세계가 보인다더니 이제사 우리가 왜 백의민족이라 자칭하는지 깊이 수긍이 간다. <플레전트 빌>의 원작자는 혹시 백의민족이란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싶다.김형태/ 황신혜밴드·화가 www.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