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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편지생각
2002-11-21

신경숙의 이창

얼마 전에 아는 분 집에 가서 저녁밥을 얻어먹었다. 약속된 일이 아니라 말씀 드릴 일이 있어 찾아갔다가 염치 좋게 저녁밥까지 먹고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분 댁에 결혼해서 미국에 나가 살고 있는 딸이 있었다. 어쩌다 그 따님 얘기가 나오자 두분 내외가 딸이 보고 싶었던 차였는지 따님 얘기를 길게 하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남편과 함께 낯선 땅에 가서 살자니 얼마나 힘이 들까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딸이 편지를 얼마나 열심히 보내오는지 바로 옆집에 사는 듯하다는 거였다.

편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요즘도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는 자식이 있나 싶었던 것이다. 전화가 얼마든지 되는데 말이다. 편지를 길게 쓰나 봐요 물었더니 길게 쓰기도 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그림으로 그려 보낸다니까… 하였다. 나는 더 궁금해졌다. 그분들은 내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렇게저렇게 설명을 해보시다가는 아예 따님이 보낸 편지 상자를 꺼내왔다. 상자 속에는 그동안 딸이 보낸 편지가 스크랩되듯 보관되어 있었다. 보내온 순서대로 읽기 좋고 보기 좋게 해놓았다. 물건 정리를 못해 주변을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이 해놓고 사는 나로서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저희들 추억도 될 것 같아서 돌아오면 돌려주려고 그리 모아놓았다고 했다. 그렇게 보게 된 미국에 사는 딸이 한국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들에 그만 나는 홀려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글이 정성스럽고 다감한 것은 둘째였다. 그들이 어떤 방에서 물건을 어떻게 배치해놓고 사는지 어느 문을 열고 들어와서 밥을 짓는지, 책상에서 어떻게 앉아 공부를 하는지, 잠자는 침대는 어떻게 생겼는지… 일일이 종이에 약도처럼 그려놓았지 않은가. 그림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사진을 찍어서 첨부하질 않았는가. 이 탁자는 어디서 샀으며 커피포트는 어떻게 구했는지 현재 편지를 쓰고 있는 위치는 어떻게 되는지 편지를 통해서 다 알 수가 있었다. 옆에서 보듯 선명했다.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그분들의 따님이 왜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던지. 아, 편지를 이렇게 쓸 수도 있는 것이구나, 감탄했다. 남의 편지라 여기에 공개할 수 없는 것이 좀 안타깝다. 그 따님은 시댁에도 그렇게 편지를 써 보내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나이 드신 시어머니가 안심하고 즐거워한다고 하였다. 누군들 그런 편지를 보내는 며느리가 있다면 즐겁지 않겠는지.

돌아오는 길에 옛 생각이 났다. 70년대 말에 시골의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나에게 가끔 이런 편지를 부쳤다.

“쌀 부쳤다. 차아다 먹거라.”

지금처럼 전화가 흔하지도 하루 만에 도착하는 택배가 있던 때도 아니라서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으면 서울역 물품보관소로 쌀을 찾으러 갔다. 아버지는 뭘 부칠 때만 그저 흰종이에 검은줄이 그어져 있는 편찰지에 간단하게 써서 부쳤다. 철자법도 소리나는 대로 적었다. 가끔은 편찰지에 쌀겨 같은 게 묻어 있기도 했다.

80년대엔 리비아의 건설현장에 나가 있던 큰오빠가 가끔 이런 식의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잘 있느냐. 나는 잘 있다. 식구들은 모두 무고한지 궁금하구나. ”

큰오빠는 내게는 가끔이었지만 시골의 아버지에겐 열흘에 한번씩 편지를 보냈다. 역시 편찰지에 칸을 두줄씩 잡아서 글씨를 최대한 크게 썼다. 우리집의 아버지와 큰오빠 사이는 좀 유별났다. 자기가 단정하니까 남들도 다 그러려니 생각해서 화낼 일이 많은 사람이 큰오빠인데 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온화했다.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서가 아니다. 우리 아버지는 권위란 없는 분이시니까. 아버지는 큰오빠가 스무살이 될 무렵부터 오히려 큰오빠를 의지하며 사신 듯하다. 무엇이든 아들에게 물어서 행하였다. 니가 그리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이러했다. 그러한 아들이 기반을 잡아보겠다고 해외에 나가자 그때는 아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보내오는 편지에 의지했다. 전주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조차 편지가 왔을 것이다, 라며 정읍에 내려가 편지를 가져오게 해서 읽고는 했다. 나는 그때 아버지와 큰오빠가 내게 보낸 편지들을 한장도 갖고 있지 않지만 아버지는 지금도 큰오빠가 보내온 편지들을 갖고 계신다.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