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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위에서도 역사는 흐른다,<쇼군 토탈 워>
2002-11-14

컴퓨터게임

나에게 게임은 놀이지만 일이기도 하다. 한달에 서너개, 많을 때는 네댓개까지 새 게임을 해보고 글을 쓴다. 이 많은 걸 다 해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플레이를 끝낸 뒤 보관하는 것도 문제다. 우선 큰 박스를 주워온다. TV나 냉장고 박스는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고, 라면 박스는 너무 작아서 몇개 못 담는다. 모니터 박스 정도가 제일 적당하다. 박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6개월 정도면 하나가 가득 찬다. 그러면 창고에 집어넣는다. 그런데 가끔 박스 속의 게임을 못 견디게 하고 싶어진다. 질릴 만큼 하고 집어넣은 지 6개월, 어떤 때는 1년이 훌쩍 지났는데 당장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생각에 휩싸인다.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발작이고 치유책도 없다. 박스란 박스는 다 꺼내놓으며 난장판을 만드는 게 몇번 반복된 뒤 대책을 세웠다. 다시 하고 싶을 것 같은 게임을 엄선해 박스에서 구출한 뒤 책장과 천장 사이 빈 공간에 나란히 세워놓았다.

어떤 게임은 세월이 지난 뒤 새롭게 떠오른다. <쇼군 토탈 워>를 처음 했을 때는 독특하고 잘 만든 게임이라는 생각은 했어도 그다지 오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2년이 흐른 지금 난데없이 불타오르고 있다. 어떤 게임은 벗어나려고 애써보지만 실패한다. <던전시즈>는 3D 롤플레잉 게임이다. 순발력이 떨어지는데다가 3D에 적응 못하는 체질을 가지고 있어서 큰 기대 안 했는데 의외로 너무 재미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새벽이 돼서야 시뻘게진 눈을 비비며 리뷰를 썼다. 이러다간 안 될 것 같아서 친구에게 빌려줬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기에 돌려받았다.

<위자드 앤 워리어>나 <바람의 기사>는 굉장히 열심히 했지만 어느 순간 진이 빠져서 그만뒀다. 50시간, 100시간을 해도 끝나지 않는 게임은 뭐든 사소한 계기로 중단하게 되면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하리라는 야욕으로 책장 위로 모셨다. <디아블로>와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2>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3> <대항해시대2>는 엔딩을 여러 번 봤는데도 주기적으로 다시 플레이하고 싶어지는 게임이다. 이렇게 오래된 게임들을 지금 운영체제에서 플레이하려면 패치를 해야 하지만 그 정도 수고야 기꺼이 감수한다. 디스플레이 설정을 256컬러로 해놓아서 묘하게 된 바탕화면도 꾹 참는다. <발더스 게이트> <플레인 스케이프 토먼트> 역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쯤 더 해보겠다는 기약 속에 머리에 먼지를 쓰고 있다.

책장 꼭대기의 게임들 중 전혀 해보지 않은 것도 있다. <RPG 만들기 95>는 일본에서 97년에 나왔지만 국내에서는 몇번의 연기 끝에 뒤늦게 나왔다. 화려한 3D 그래픽의 시대에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혼자서 만드는 게임에 대한 꿈을 접을 수는 없다. 다음 <RPG 만들기>가 나올 때까지는 자리를 지킬 것이다. <탱구와 울라숑> 같은 어린이용 게임은 선물할 애아빠 친구를 만나질 못해 몇달째 지지부진 있고, <마그나 카르타>처럼 단순히 패키지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박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게임도 있다.

명예롭게 은퇴해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게임, 잘 나가다 삐끗해 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게임, 아직도 전성기가 끝나려면 먼 게임, 아직 데뷔를 못한 유망주들, 마음에 맞는 새 주인을 찾아가려는 게임, 팔을 활짝 벌려서 가둘 수 있는 작은 공간에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창고 깊은 곳 박스 속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