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빌이 그럴 줄은 몰랐다. 언제나 친절한 이웃이었고 게다가 건실한 경찰관이었던 빌이 고작 아내의 과소비 때문에 돈이 궁해졌다고해서 셀마의 그 소중한 돈- 아들의 눈 수술을 위해서 중노동으로 푼푼히 모았던 그 돈을 훔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래, 여기도 또 시작이다. 매일매일이 힘들고 고단한 일상만으로도 모자라 또 나쁜 일이 생긴다. 꼬인다. 엎친데 덮친다. 불행은 늘 ‘본의 아니게’찾아오고 ‘그럴려고 그런 게 아닌데’ 결국 그렇게 엉망진창이 돼버리는 것이다.
셀마는 점점 멀어가는 눈으로 위험한 기계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일한다. 자칫하면 손이 잘릴 수도 있다. 눈이 멀다- 맹목. 셀마는 아들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일을 했고, 빌은 돈에 눈이 멀어 셀마의 돈을 훔치고, 셀마는 그 돈을 지키기 위해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결국 분별없는 집착에 빌도 죽고 셀마도 죽는다. 아무도 얻은 것은 없다. 모두 잃었다. 이 맹목의 몸부림들이 결국은 ‘어둠 속의 댄서’들이 추는 슬픈 춤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하루하루도 사실 그녀의 불안한 일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도 하루하루 눈이 멀어가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알게 되고 세상살이를 이력으로 눈을 뜨면서부터 한편 눈이 멀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늘귀 같은 일류대학을 목표로 불철주야 수능시험 준비에만 몰입하는 청소년들도 어둠 속의 댄서들이다. 밤바다를 저 멀리 신기루처럼 가물거리는 불빛 하나만 믿고 노 저어나가는 어둠 속의 나룻배와 다르지 않다. 더 높고 권위 있는 의자에 앉기 위해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일중독 증세를 보이며 전진하는 대기업 김 부장님도 어둠 속의 댄서이다. 하루종일 주식시세만 바라보며 주가등락에 춤추는 저이도 어둠 속의 댄서이다. 돈에 눈 멀고, 사랑에 눈 멀고, 명예에 눈 멀고, 출세에 눈 멀고, 내 자식에 눈 멀고, 밥그릇에 눈 멀고, 막무가내 아줌마. 큰소리 아저씨. 차라리 날 죽여라. 맹목의 세상이니 온통 어둠뿐이고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니 그 모양새가 영락없이 춤추는 꼴이라 우리는 어둠 속의 댄서들이다. 아슬아슬 몰락과 타락과 탈락의 함정 사이를 아찔한 스텝으로 밟아나가며 연명하는 어둠 속의 댄서들이다.
점점 눈이 멀어간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미리부터 어둠 속에서 촉감만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시작하며 준비를 할 것인가. 아니면 아직 빛을 볼 수 있는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더 많은 것을 보며 조금이라도 더 현재를 누릴 것인가.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이 될런지 나는 선택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세상살이에 대해서,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해 내가 점점 눈이 멀어간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훗날을 준비하며 눈이 멀어가는 것을 받아들이기보다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해서 애쓸 것이다. 돈에 눈이 멀어서 친구를 잃게 되는 일이나 큰 욕심에 눈이 멀어서 소중한 꿈들을 말라죽게 하는 맹목적 실수는 하고 싶지 않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날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나는 보지 못하고 맹목적 전진만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이미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뿐이다. 자, 어쨌든 인생가는 계속 흐르고 우리는 계속 춤을 추며 외줄타기 인생길을 가고 있고 눈은 점점 어두워져간다. 혼자 헛디뎌 떨어지는가 하면 옆 사람을 밀쳐내기도 한다. 악인은 없다. 단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날 뿐이다. 행복은 익숙해면 무감할 수 있지만 불행은 아무리 익숙해도 무감할 수 없다. 그러니 눈을 똑바로 뜨자. 죽는 날까지 현명한 분별력이 함께 하기를.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001@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