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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장수 천국을 위하여
2002-11-06

성석제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난번에 우리나라를 ‘장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가 욕을 충분히 얻어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특히 정부 당국자들의 관심과 연구를 촉구하는 내용의 글을 썼는데 정부에서는 물론 사방에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남들은 다 알고 이미 실천하고 있는 이야기를 뒤늦게 쓴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다. 일단 내가 자주 다니는 S교차로의 공사장만 봐도 그렇다.

이 교차로는 약 7, 8년 전에 차선을 대대적으로 늘리고 고가도로를 설치하는 공사를 완공했다. 그 공사에 걸린 시간은 잘 모르지만 규모로 미루어 4, 5년은 족히 걸린 듯하다. 그런데 여섯달도 못 돼 다시 그 교차로의 지하를 파서 남북으로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더니 아직까지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내가 그 공사의 개요를 확인한 건 불과 며칠 전이다. 도대체 누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왜, 무슨 공사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7, 8년을 참으며 다닌 나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사람들은 나와 같은 길을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출퇴근을 했더라면 며칠 결근을 하는 한이 있어도 그 더럽고 시끄럽고 덜컹거리는 데다 먼지투성이이며 안전을 확인할 길 없는 공사판의 발주처, 공사 시행 주체를 알아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교차로의 공사는 불편하고 성질을 건드린다.

그런데 불과 며칠 전에 나는 그 공사의 이름과 시행처, 기간이 적힌 팻말이 공사판 앞쪽 10여 미터쯤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길은 내리막이라 멈추기도 만만치 않고 팻말도 공사판 규모의 십만분의 일 정도, 그러니까 가로 50cm 세로 70cm 정도에 불과해서 내용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내가 팻말을 발견한 그 순간 뒤에 따라오는 차가 없었고 내가 차를 세우고 팻말에 적힌 많지 않은 글자를 판독하는 동안에도 가라고 재촉하는 차가 없었다. 다른 것은 이미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확실한 것은 공사기간으로, 완공일이 석달쯤 지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공일도 벌써 몇번이나 고쳤는지 다른 곳보다 페인트가 두껍게 칠해져 있었다. 어쨌든 ‘욕 먹으면 오래 산다’는 진리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욕을 참지 못해 욕을 하려고, 해주려고 공사판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여느 직장 같으면 정년퇴직을 하고도 남았을 세 어르신들만이 청소 같은 잡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눈이 빠지게 쳐다보아도 그 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포크레인이며 크레인 같은 장비들도 모두 멈춰져 있었다. 나는 잠시 감동했다. 저 노인들에게 장수의 기회를 주기 위해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사람들, 가령 건설회사 현장소장, 건설회사 경영자, 감리자, 기타 공무원들에게. 자신들이 욕을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에게 양보한 그 고귀한 정신에. 이 얼마나 투철한 희생정신이냐. 공사가 무한정 길어질수록 공사판을 대표하는 어르신들이 욕을 먹는 양도 늘어나고 수명 역시 무한으로 증가할 것이다. 아, 아름답다.

그러다 문득 나는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하기 위해 한 후보를 버리고 다른 후보쪽에 가담했다는 어느 정치인을 떠올렸다. 영민하고 젊은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그는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는 이 진리를 조용히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통령이 어느 누가 되든 짧은 기간에 근래 보기 드물게 엄청난 욕을 먹을 것인데 이제 삼십대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남보다 엄청나게 기나긴 노후를, 장수를 준비하고 있다니. 오 젊은이여, 나는 실로 두렵다. 그대의 빠른 변신, 논리의 자재한 전환, 그리고 쉬지 않는 발걸음이. 영화(榮華)를 누리며 오래오래 살지어다.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