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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10부작 - 미국
2002-11-01

새로 쓰는 미국학개론

<MBC스페셜>일요일 밤 11시30분

수잔 서랜던과 팀 로빈스, 마틴 신 등 굵직한 할리우드 스타들이 부시 미 대통령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배우들이 자신의 이해득실과 상관없는 ‘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걸 보면서, 미국 대중문화의 ‘두께’가 만만치 않음을 절감한다. 한편 할리우드 반대쪽에서는, 발리 폭탄테러 사건으로 입지가 한결 나아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공격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조지 부시에게는 세계 경제의 동반 추락을 염려하는 셈 빠른 증권가 사람들의 우려조차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은 제쳐두고라도.

대체 어느 쪽이 ‘진짜’ 미국일까. 패권주의 국가의 면모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부시의 행보와 대중스타들의 성숙한 모습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있다. 그 어떤 나라보다 가깝고, 그래서 손쉽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은 언제나 이처럼 극단적인 두개의 얼굴로 다가오곤 했다.

9·11 테러 1주년이 되던 날, 미국을 좀더 균형잡힌 시각으로 조명하기 위한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MBC스페셜>의 ‘연속기획 10부작 - 미국’이 그것이다. 이 시리즈는 시작부터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는데, 첫편인 ‘9·11 그후’가 조금은 조심스러운 소재를 과감히 다뤘기 때문이다. ‘9·11 그후’는 아프가니스탄에 한바탕 보복을 한 뒤에도 여전히 전쟁 중인 미국사회 구석구석을 보여줬다.팔레스타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치소에 갇힌 중년 남성을 비롯해, 미국의 무슬렘들은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변변히 항의조차 못하는 상황이다. 미국인들이 그토록 강조하던 인권은 ‘애국주의’라는 미친 바람의 횡포 앞에 간단히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테러 1주년 관련 방송들은 끊임없는 추모 행렬과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인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쳤지만, <MBC스페셜>은 9·11 테러가 낳은 더 무섭고 일상적인 폭력의 실상을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이어진 2편 ‘자유의 여신상’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수많은 이들이 어떤 경로로 신대륙에 흘러들어 살아왔는지 짚어본 ‘미국 이민사’였다. 현재 미국 내에 존재하는 ‘갈등의 뿌리’가 어디인지 더듬어본 것이다. 3편 ‘전쟁과 평화, 그리고 진실’에서는 제3세계를 향한 미국의 정치경제적 간섭과 제재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가 제시됐다.

미국 안팎의 ‘갈등’에 주목한 시리즈 전반부에 이어, 4편부터는 몇개의 키워드를 통해 미국사회를 좀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제작팀은 미국인들의 생활과 정서에까지 영향을 끼친 총기 사용문제(4편- 총의 나라)나 교육 또한 자본주의의 논리로 풀어내는 미국인들의 공교육 해법(6편-공립학교의 개혁열풍) 등을 밀도있게 담아냈다.오는 일요일에 방송되는 8편 ‘은막 위의 전쟁 - 할리우드와 펜타곤’에서는 2차대전 이래 전세계에 ‘미국의 이념’을 꾸준히 전파해온 할리우드영화들과 막후에서 이루어진 펜타곤의 할리우드 지원정책을 다룰 예정이라 한다.

<MBC스페셜> 미국 시리즈의 미덕은 기존 방송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미국의 역사와 문화, 사회상을 풍부한 자료와 생생한 현지취재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9·11 그후’나 ‘공립학교 개혁의 열풍’이 현재 미국의 이슈를 파헤치는 고발성 다큐멘터리라면, ‘자유의 여신상’이나 ‘총의 나라’는 미국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 다큐멘터리다. 시리즈 한편한편이 한 가지 주제로 완결된, 살아 있는 미국학 교과서인 셈이다.

대체로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미국을 ‘상종 못할 나라’로 폄하만 하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도 기쁜 일이다. 제작팀은 현재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나 이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처럼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야말로,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의 미국을 만든 주역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미국에 무언가 기대하거나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 일군 자신의 재산을 남몰래 기부하는 이들과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때문일 것이다(5편- 시민의 힘). 전쟁의 기운이 세계를 위협하는 오늘, 우리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조지 부시의 미국이 아니라 수잔 서랜든의 미국이다. 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