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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와의 인터뷰
2002-10-31

조선희의 이창

<블레이드 러너>의 인조인간들은 자신들의 4년짜리 수명에 항의하는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창조주인 인간들만큼 살 수 있도록 생명프로그램을 바꿔달라고 요구한다.

4년은 확실히 너무 짧았어. 하지만 우리 인간들한테 너무 불평하지마. 우리도 우리의 창조주한테 불만이 많으니까. 애초부터 70년쯤 살다가 사라지도록 설계됐다는 걸 알았을 때 나도 조물주한테 사기당한 기분이었거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블레이드 러너>의 인조인간들처럼 창조주를 찾아가서 집단적으로 항의농성을 벌이기도 하지. 주로 일요일처럼 직장이 쉬는 날을 이용해서. 이들은 고성방가하면서 시위하는데, 요구사항은 창조주처럼 영생을 살게 해달라는 거야.

어느 날, 할 일도 없고 해서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면서 나는 한가하기 짝이 없는 상상을 해본 적 있다. 사람이 영원히 산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하지만 잠깐의 상상만으로 나는 벌써 영생이 싫증나버렸다. 모든 창조의 힘은 일회적 삶, 그 제한된 시간의 긴장에서 생겨난다는 누군가의 얘기가 생각났다. 죽음은 삶의 동력이며 삶의 의욕을 추동한다. 그래서 나는 살고 죽는 게 나름대로 합리적인 시스템인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3백년, 4백년씩 사는 뱀파이어들이 행복해 보였다구 자신의 육체를 저주하는 뱀파이어의 영생이 부러웠다구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2백년을 살면서 처음엔 주인의 죽음을 보고 그 다음엔 그 아들이 죽고 그 손자가 죽고 손자의 손자가 죽는 것까지 지켜보는 로봇인간이 행복해 보였다구

영생에 대한 공상은 재밌기는 했다. 그건 마치 뱀파이어들을 집단 인터뷰하는 것과 같았다. 모두들 태어나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다면 인구는 늘어나고 자원은 고갈되고 지구가 폭발하지 않겠냐는 식의 실증주의적 사고 같은 건 이렇게 침대 위에서 공상에 잠긴 사람에게는 가당치도 않다. 그저, 우리 삶에 늙음도 죽음도 없을 경우, 라고만 해두자.

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뭘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 것 같다. 하기야 안 해본 건 또 뭐가 있겠어. 젊을 때 공부를 마치고 사회로 나갈 필요도 없으니 공부도 급할 거 하나 없고. 이 논문은 1백년 동안 쓰다보니 그동안 세상이 다 바뀌어서 이제 다시 써야 하겠어. 이 책은 340년 전에 읽었는데 내용을 까먹었으니 한번 다시 읽어볼까. 파이프오르간이나 배워보고 싶은데. 이제 새 직장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50년 동안은 수습기간이라 바쁠 테고 그 다음에 배우지 뭐. 아니, 2백년쯤 뒤에 직장을 그만두고 배워도 늦지 않겠구나.

너도 이제는 새 직업을 좀 찾아봐. 남들은 평균 1백년에 한번씩 직업을 잘도 바꾸던데 너는 천년만년 선생님만 하고 있을 거니 어휴, 그 잔소리도 1천년 동안 계속 들었어요. 부모자식 관계라는 게 처음 1백년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가족도 어떻게 한번 갈아볼 수 없을까요.

얘야, 너 이번이 몇 번째 결혼이지 글쎄요. 마흔다섯번까지는 열심히 세었었는데…. 그런데 그 남자 어딘지 낯이 익은 것 같다. 아, 그렇군요! 사진첩을 꺼내보니까 6백년 전쯤에 나하고 같이 살았던 사람이네요. 하지만 무슨 상관이에요. 그때 기억은 벌써 다 까먹은 데다가, 이제 새 사람을 찾아내기도 힘들다구요.

너 장래 희망이 뭐니 룩셈부르크하고 파푸아뉴기니에 가는 것이요. 거기서만 안 살아봤거든요. 거기 가면 혹시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저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지도 모르지요.

호기심이라구요 그런 말 처음 들어보네요. 사전을 한번 찾아볼게요. 아, 여기 있군요. 새로운 것에 대해 궁금해하는 마음. 그런데 지금은 사어(死語)가 됐다고 나와 있네요. 하기야 세상에 새로운 게 어디 있을라구요. ‘해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격언도 있잖아요.

너 이 영화 아직도 안 봤니 킬링타임 기능이 뛰어나서 칸영화제에서도 그랑프리를 받았다는데. 뭐 킬링타임에 최고라고 그런 걸작을 왜 지금 알려주는 거야. 어휴, 이 지긋지긋한 시간. 남들 보면 시간이 잘도 가는 것 같드구만, 내 시간은 도대체 왜 이렇게 꾸물대는 거야 그래도 19세기는 꽤 지낼 만했는데 20세기부터는 지루해 죽겠어. 21세기 말에 내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점쟁이가 말했으니 그때까지 지겨워도 참아봐야지. 조선희 / 소설가 전<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