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이유란의 영화사 신문 제1호(4)
2002-10-30

영화사 신문

꿈의 기계가 탄생한다

시네마토그라프가 탄생하기까지, 과학자와 발명가들은 어떻게 노력해왔나

움직이는 사진을 개발하려는 과학자와 발명가들의 노력은 1800년대 들어서 본격화됐다. 그때 과학자들은 16장 정도의 그림을 연이어 보여주면 마치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착안해 페나키스토스코프나 조이트로프 같은 광학적 놀이기구들을 발명했다.

좀더 시네마토그라프에 가까운 활동사진은 1800년대 후반에 그 꼴을 갖추어 나갔다. 1878년 미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머이브릿지는 말의 걸음걸이를 연구하기 위해 12대의 카메라를 일렬로 늘어놓은 다음 1/2초 간격으로 연속 사진을 찍었다. 1872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쥘르 마레이는 새들의 비행 등을 연구할 목적으로 사진총을 사용했는데, 이 사진총은 1초에 한번 회전하는 원형 유리판의 면을 둘러 12개의 화상이 감광되도록 했다. 한편, 1888년 미국인 조지 이스트먼은 종이가 아닌 셀룰로이드로 된 롤 필름을 고안해 움직이는 사진 발명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이스트먼 필름을 처음 활용한 사람은 축음기와 전구를 발명한 미국인 에디슨과 조수 딕슨. 그들은 1891년 이스트먼 생필름을 이용해 키네토그라프 카메라와 키네토스코프 관람상자를 만들었다. 딕슨은 이스트먼 필름을 1인치(대략 35mm) 너비의 띠로 잘라내고는 필름이 카메라와 키네토스코프를 통과할 때 톱니가 필름을 끌어당길 수 있도록 각 프레임 양쪽 끝에 네개의 구멍을 뚫었다. 이어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에서 상영할 필름을 만들기 위해 1893년 뉴저지에 있는 에디슨의 실험실 부지에 블랙 마리아(죄수호송차를 칭하는 속어)라는 스튜디오를 만들어 제작에 들어갔다. 대부분은 유명한 보드빌쇼와 스포츠맨, 무용수, 곡예사들을 담은 것이었다. 다른 영역에서 유능한 사업 수완을 보여줬던 에디슨은 1894년 4월 첫 번째 키네토스코프 전시점을 뉴욕에 열었다. 관객은 1니켈을 내고 들어가서 조그만 구멍에 눈을 바짝 대고 영상을 들여다보고 흥분했다. 이어 에디슨은 미국과 해외로 사업망을 확대했다.

한편 독일에서는 막스와 에밀 스클라다노프스키 형제가 셀룰로이드 필름에 연속사진을 찍는 데 성공한데 이어, 두줄의 영사 슬라이드가 동시에 움직이며 번갈아 영상을 쏘아대는 비오스코프라는 거대한 영사기를 개발했다. 비오스코프는 그랑카페 상영보다 앞선 1895년 11월1일 대중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같은 노력과 기술적 성과들이 있었기에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라프를 발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뤼미에르의 실제 업적은 단 하나, 그전까지의 모든 연구들을 종합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네마토그라프의 발명 이후, 어떤 기계도 이에 대적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발명의 의미는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둠의 왕국, 생명의 그림자막심 고리키/ 러시아 소설가·<어머니>

어제 저녁 어둠의 왕국에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정말로 낯선 세계였다. 소리도 색채도 없는 어둠의 왕국. 땅, 물, 공기, 나무들과 사람, 모든 것이 다 잿빛이었다. 그것은 어두운 생명의 그림자였고 소리없는 망령의 움직임이었다. 혹시 독자들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몇 가지 변명을 늘어놓는다. 나는 장터에 있는 오몽씨네 식당에서 활동사진이라 불리는 뤼미에르의 발명품을 보았다. 내가 받은 인상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그것들을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지만 그중 본질적인 것만이라도 지적하려고 한다.

정지화면에 이어 갑자기 찰칵 소리가 나면서 화면이 살아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끝에 가만히 놓여 있던 차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삶의 숨결을 내뿜다가 화면을 벗어나 미지의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마치 영원히 소리를 낼 수 없으며 모든 생명의 색깔을 빼앗긴 형벌에 처해진 듯한 사람들이 흐릿한 회색 윤곽으로 잿빛 땅 위를 걸어다닌다. 소리와 색깔을 잃어버린 생명, 창백한 잿빛의 생명, 누추하기만 한 삶을 우리는 보고 말았다.

이처럼 소리없는 잿빛 생명에 지쳐갈 때쯤 영화가 끝났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길하고 불확실했으며 우리의 마음을 질리게 만들었다.

이 발명품이 어째서 과학적 가치를 가지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이 발명품을 과학에 봉사하기 위해, 인간을 한 단계 고양시키기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확인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런 식당에서 틀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영화는 하나의 추문이 된다. 사회적인 필요에 맞춰 고른 장소가 고작 여기인가? 그렇다면 뤼미에르의 의식도 오몽 같은 시정잡배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단 말인가?

나는 <옷 벗는 방법> <목욕하는 여인> <여인의 속옷> 같은 영화도 모았다. 화끈한 것을 기대하는 장터 사람들에게 목가적이고 고리타분한 장면이 잘 먹히지 않을 줄 나도 안다. 그러나 그게 문제라면 내가 다른 소재를 제시할 수도 있다. 부랑아를 하나 붙잡아 꼬챙이에 꽂아서 울타리에 걸어놓으면 어떨까? 물론 이것이 진짜로 대중이 원하는 화끈한 장면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 교훈을 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니예고로트시킬리스토크>, 1896년 7월4일치),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영화의 탄생>에서 발췌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