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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고 지친 날의 꼴라쥬
2001-04-11

정윤수 칼럼

▣ ‘무항산(無恒産)이어도 무항심(無恒心)’이라고 맹자는 가르쳤다지만 놀고먹는 주제에 어찌 항상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부질없다. 몸살을 앓은 지난 며칠, 실질적 의미에서 생산이란 말에 값할 만한 사회적 행위에 전혀 가담하지 못한 처지에서 한가로이 무항심을 타령삼아 입에 붙이는 신세는 스스로 재봐도 남루하다. 요컨대 아플 때는 사람은 약해지는 법이다. 잘못 살아왔다는 당혹감에 치를 떨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잡히는 책, 약방문, 하다못해 과자 봉지의 ‘쓰레기는 휴지통에’라는 경구에서도 독감이 던져준 열패감을 마주한다. 요 며칠 앓은 덕분으로 나는 다음 세 가지를 특히 새기게 되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종교란에 여전히 ‘무교’라는 이상한 종교를 적지만 그래도 이따금 종교를 가리지 않고 경전을 보는데 이번에는 우연히 신약이었다. 잠언 28장의 말씀이 지극히 율법적인 도덕명언이라면 예수가 가버나움 산상에서 가르친 말씀이란 정녕 강퍅하고 병든 마음을 다스리는 바가 크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해 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들에게 모두 하늘의 복이 있겠거니와 특히 7장의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대목에 이르면 비단 고열에 따른 식은땀만이 아닌 어떤 자책이 등줄기까지 축축하게 만든다. 고작 호미걸이 잔재주로 허명을 재촉하는 세치 혀. 패가 걸린 것도 모르고 거듭 돌을 줍다가 앗차, 실격패.

▣ 황병기의 가야금: 어디 쓴 글 때문에 오랜만에 황병기의 <숲> <침향무> <비단길> <밤의 소리> <소엽산방>을 다시 들었지만 오히려 의문만 더 커졌다. 민족적 감정을 생략한다면 이 무애하면서도 뭔가 턱 밑이 차오르는 기이한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우리 민족의 집합적 음감을 잊는다면 황병기는 전통이 아니라 현대의 음악, 그것도 자세는 단정하지만 내면은 극단을 달리는 실험의 뜨거운 실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페르콜레지: 스물여섯에 죽고 말았다는 것이 천재적 예술가 목록에서는 그리 대단한 이력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스타바트 마터>(슬픔의 성모)의 작곡가라면 경우가 다르다. 어떻게 이처럼 지순한 슬픔, 말갛게 씻어낸 눈물이 있을까. 고작 스물여섯의 나이에 이처럼 세속의 슬픔을 초월해버릴 수 있을까, 의문이고 경탄이다. 예컨대 동시대의 헨델이 작곡했다고 전해지는 <마리아의 눈물>과 이 곡은 대척이다. 헨델의 마리아는 정녕 인간의 얼굴을 한 여인이다. ‘나보다 불행한 이 또 있으랴’로 시작하여 ‘매맞고 가시에 찢기고 세상에 멸시받으며 하늘에 버림받았네’ 하며 절규를 하다가 끝내 ‘아, 내 아들 외치는 소리 천사여 듣지 못하는가’ 하고 하늘마저 저주하는 애끓는 소리, 더욱이 그 곡을 얼마 전 다녀간 무지카 안티콰 쾰른(라인하르트 괴벨 지휘)에 안네 소피 폰 오터의 소름돋는 절규, 금방이라도 머리칼을 뜯으며 광기를 터트릴 듯한 격렬한 분노의 소프라노라면 더욱 그렇다. 구세주가 될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아들을 잃었으니 이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어미의 처절한 심정은 <마리아의 눈물>에서 격렬하게 표출된다. 반면 페르콜레지의 마리아는 요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여인 그대로다.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중세의 가을, 템포는 단정하고 현들은 안으로 슬픔을 삭인다. 이윽고 카운터테너와 소프라노의 이중주. 성대의 울림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그 제한된 엄격한 틀 안에 마리아의 비통함을 응축시키는 페르콜레지. 중세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동경이란 요즘의 나날이 자유분방의 철책선을 넘어 대책도 없이 날뛰는 무절제의 적나라함으로 변질된 것에 연유하지 않을까.

▣ 몸살이 철없는 감상을 선사한 셈인데, 말이 나온 김에 이 곡의 명반을 조금 가려서 권하고 싶다. 일단 세실리아 바르톨리, 바바라 보니처럼 현대 성악의 톤이 강한 기록보다는 이른바 고음악 정격 연주자들이 페르콜레지의 응축미를 잘 살려준다. 그렇다고 정격 연주의 대가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지휘를 맡고 역시 바로크 성악의 대표자인 엠마 커크비와 제임스 바우만이 노래한 데카 음반을 선뜻 사는 것은 피하자. 각자의 이름만으로도 퀄리티가 보장된 세 사람이 페르콜레지에 있어 이토록 불협화를 빚었다는 것은 세계 8대 불가사의에 속한다. 대신 로버트 킹 지휘에 질리언 피셔와 마이클 챈스가 부른 히페리온 음반이 있다. 안드레아스 숄의 천부적인 미감 때문에 다소 인색한 평가를 받았지만 그래도 수도원의 지하예배소에서 울려퍼질 만한 곡에서는 마이클 챈스가 제격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 곡의 절대 강추 음반은 르네 야곱이 지휘와 카운터테너를 맡고 보이소프라노 크리스티앙 헨닉이 가창을 빛낸 아르모니아 문디의 것. 만약 당신이 문득 천사의 소리를 들었다면 기도의 힘이요 주의 은총이라고 믿기 전에 시디 플레이어를 먼저 확인해보기 바란다. 틀림없이 르네 야곱과 크리스티앙 헨닉의 음반이 들어 있을 것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