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 마리 카란지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유일의 패션잡지였던 <멋>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요절한 레즈비언 패션모델의 비극적 삶에 대한 상당히 자세한 기사가 그 잡지에 실렸었죠. 아마 스티븐 프라이드가 지아의 전기 를 발표하기 조금 전에 썼던 <배니티 페어>의 기사를 번역해서 올린 게 아닌가 싶어요.
하여간 어린 나이에 그 기사를 읽고 얼마나 강한 인상을 받았던지요. 이 필라델피아 출신 패션모델의 이야기는 끔찍할 정도로 로맨틱했습니다. 하긴 이런 화려한 사람들의 몰락의 과정은 언제나 로맨틱해보이는 법입니다. 게다가 지아는 정말 정상까지 올랐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경우였습니다. 한때는 <보그>나 <코스모폴리탄>을 장식하는 일급 모델이었다가 다음에는 에이즈에 걸린 마약중독자로 죽었으니까요. 전 아직도 지아의 사진을 볼 때마다 종종 소름이 끼칩니다. 특히 80년대식 호사스런 패션 사진에 찍힌 그 사람 팔에서 주사자국을 발견할 때는 더욱 그렇죠.
그러다 인터넷을 통해 이 사람의 전기영화가 HBO에서 제작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흥분했던지요. 그리고 타이틀롤을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한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제 흥분은 극에 달했답니다. 그때부터 어떻게든 이 영화를 잽싸게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들기 시작했죠.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녹화해달라고 애걸복걸을 해서 간신히 이 영화 <지아>의 녹화테이프를 구했을 때는 마치 십여년 전에 잃어버린 일기장이라도 찾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영화는 어땠냐고요? 글쎄요. 전 <지아>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보여준 연기에 굉장히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직까지 그 사람이 보여준 최고의 연기라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노골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끔찍할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감독 마이클 크리스토퍼의 연출은 조금 작위적인 구석이 있었고 프라이드의 전기를 스토리 전개를 위해 멋대로 개작한 건 그렇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토퍼가 뜯어고치기는 했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지아의 일생을 따라가는 기분은 정말로 특별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맨 처음 느꼈던 것은 조금 다른 감정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불편했어요. 하긴 마약중독으로 죽은 젊은 여자이야기를 보면서 불편함과는 다른 어떤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이야말로 뭔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처음 <멋> 기사를 읽었을 때 느꼈던 격렬한 로맨티시즘은 다시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영화의 잘못이었을까요? 아뇨, 영화 <지아>는 수많은 예술적 실수를 저질렀지만 로맨티시즘의 결여는 그런 실수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원인은 좀더 당연한 것이었어요. 십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것입니다. 운명의 거창한 폭력을 관람하며 대책없이 황홀해했던 당시의 호르몬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어요. 이제 저에게 남아 있던 건 자기 삶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불쌍한 젊은 여자에 대한 동정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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